매장중심서 인식변화… 납골당 등 관심늘어
장례식장도 혐오시설이 아닌 기업으로 부상
주민 상부상조. 즐기고 찾는 문화 정착돼야
지난 설, 성묘를 다녀온 사
지난날 우리의 묘지는 세도가는 호화분묘를 쓰고 서민들의 묘는 초라하게 치러 양극화가 두드러졌다는 걸 알 수 있다. 개항 이전까지 그러했는데 일제가 들어서며 ‘공동묘지’라는 걸 지정, 서민들은 그곳에 묻혔다. 그 시절에도 웬만한 집안에서는 규모와 형식을 따지지 않고 치렀다. 그것이 60~70년대까지 이어져 어느 외국인은 한국의 산야는 생자(生者) 것이 아니라 온통 사자(死者) 몫이라 지적한 일이 있다.
특급호텔에 葬禮部 등장
불교에선 화장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매장에 의존하는 상황이다. 화장의 경우도 납골이냐, 산야에 뿌리느냐, 강물에 띄우느냐 고민을 하는 경우도 있는 줄로 안다. 장례의식이나 묘지형태는 나라와 부족에 따라 천태만상이지만 우리의 경우도 기이한 면이 없지 않다. 60년대 서해낙도에 갔다가 초분(草墳)이라는 걸 본 일이 있다. 죽은 사람의 시체를 들 것에 실어다 야산기슭에 안치하고 풀 더미로 덮어 놓았다. 주민의 설명에 따르면 육신(살덩이)을 삭히고 나서 뼈만 거둔다고 했다.
놀라운 풍속이다. 그 풀 더미는 ‘뱀’도 끼어들고 ‘지네’, ‘지렁이’ 같은 파충류가 집단 서식하는 온상이었다. 또 한 가지, 인도에 취재차 갔다가 먼발치에서 사자(死者)처리 방식(?)을 보고 놀란 일이 있다. 무슨 동물의 사육장처럼 산마루에 철망을 쳐 놓고 그 안에 노대를 구축, 시체를 며칠간이고 방치해두면 산속깊이 서식하는 독수리가 날아와 시체를 요리한다.
그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로 가슴을 후벼 심장 등 내장을 파먹고 나면 시체를 거둬간다. 인도 한 부족(部族)의 장례형태지만 등골이 오싹해진다. 이는 원시적 신앙의 한 단면으로 만물은 순환법칙(먹이사슬)에 따라 먹고 먹히는 절차를 거쳐 무로 돌아간다는 뜻인 듯싶다. 화장을 해서 강물이나 산야에 뿌리기도 하고 단지에 담아 납골당, 절로 가는 경우도 있다.
인도의 거목 ‘네루’총리의 경우는 유언에 따라 비행기에서 국토 이곳저곳에 공중살포한 건 유명한 이야기다. 화장방법도 그렇다. 불가(佛家)의 다비(茶毘)는 장작불로 태우지만 화장장에선 전기로 처리한다. 묘지는 ‘평토장’과 봉분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갈린다. 장례는 3일, 5일, 7일장에 옛날 궁중에선 몇 달을 두고 온 백성이 이에 매달려 일상생활이 정지되는 그런 일도 있었다. 그 다음은 상주의 몸가짐을 들 수 있다. 목이 쉬도록 곡을 하며 밤을 새우며 ‘굴건제복’하고 손님과 맞절하다 무릎을 다쳐 입원하는 사례도 있었다.
서산시 성연에서 있었던 효자이야기·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며 2년간을 모셨다는 그 효심…. 하지만 효심은 갸륵하나 그렇게 하는 게 효의 전범(典範)이냐는 반론도 없지 않을 것이다. 선진국에선 대부분 평토장(平土葬)을 하고 ‘아무개 묘’라는 비를 세우는 게 보통이다. 이제는 인구증가에 따라 사망자가 늘어나 결혼식 못지않게 장례식장은 날로 붐비고 있다. 그 바람에 장례식장은 이제 혐오시설이 아니라 하나의 기업(?)으로 급부상하기에 이르렀다. 이 또한 시대의 변화 탓이다.
이웃 일본에선 도쿄 한 복판 저 유명한 ‘뉴오타니호텔’이 ‘장례예식부’를 설치해서 화제를 모았다. 처음에는 세계적인 ‘호텔’에 혐오업종이 웬 말이냐고 종업원들마저 볼멘소리를 했지만 결과에 만족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사교장소’로 안성맞춤인데다 거기서 얻어내는 부대(연계)수익이 크다는 걸 발견한 때문이다.
일본의 모 경제지에선 장례시장 규모가 연 20조원이라 내다봤다. 호텔들이 그래서 다투어 장례식장을 서두르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와 같은 추세 때문인가. 얼마 전 대전의 S병원 장례식장이 신장개업, 내부에는 상주가 짬짬이 쉴 수 있는 방과 목욕시설까지 갖췄다고 했다. 이를 계기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서울[遷都]도 風水地理에
묘지문화를 꺼내다보면 중국의 진시황 묘, 이집트의 피라미드(일각에선 그것은 묘지성격이라 말한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묘와 장군 묘를 떠올린다. 또 있다. 일본 미야자키(宮崎)의 대묘 그리고 신라의 왕릉, 백제의 무령왕릉이 그 반열에 낀다. 이쯤 거창한 고분이야기는 접고 보통 묘와 ‘풍수지리’ 그리고 지관이야기로 좁혀가 보자.
그럼 ‘지관’이란 무엇인가. 보는 시각에 따라 그것을 비과학적인 주술(샤머니즘(shamanism)분야라 폄하하는 이가 있지만 우리의 풍수지리란 수수백년 아니 그 이상의 시공(時空)을 민족사와 맥을 같이 해 온 삶의 형태였다. 풍수를 논(說)하는 측에선 그것이 무속(巫俗)이 아니라 현실의 입명(立命)과제요, 미래를 개척하는 예언자임을 자처한다.
‘지관(地官)’은 당나라에선 호조(戶曹)를 ‘지관’이라 했고 주(周)나라 때는 6관의 하나로 크게 우대했다. 조선시대에 와선 호조의 별칭을 ‘지관’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시대마다 이 ‘지관’은 조정 깊숙이 파고들어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예로 이태조(李太祖)가 계룡산하(현 육군본부자리)에 도읍을 정하려다 한양(서울)으로 옮긴 것은 무학대사(舞鶴大師)의 조정이 있었다지만 이 또한 풍수지리 때문이었다.
모두 明堂을 찾아 헤맨다
풍수지리설[原理]에 대해 비전문가가 함부로 떠벌릴 입장은 아니지만 그것이 중국에서 전래, 오랜 세월 민족의 정신세계와 생활양식에 크게 작용해 온 것만은 확실하다. 조선조 때는 크게 성행을 해오다 일제식민통치 아래 억압을 당했고 동시에 현대과학이 계량위주의 편파(부분)논리에 눌려 집대성을 못한 것만은 확실하다. 이때부터 식자층은 좋은 터를 골라 권력 장악과 개인, 가문의 부를 탐하는 쪽으로 악용했다.
‘지관’은 형극론(形極論)을 곧잘 거론하는데 이는 땅 모양새를 용이나 호랑이 등 영모와 때론 연꽃과 매화 같은 식물, 인간의 모양새로 파악, 이것들의 특징을 살펴 기(氣)가 모이는 혈(穴)을 찾는데 골몰했다. 그래서 연화도수(蓮花到水)니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 등으로 정해 놓고 인간과의 조화를 잇는 쪽으로 기울었다. 이를 ‘무속’으로 간주하는 측에서는 ‘점술’과 같은 것이라 해서 적중률이 반반(半半)이라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풍수지리의 대가 이지함의 ‘토정비결’의 확률 역시 그와 같다는 논리다.
그것은 경험도 아니요, 통계 또한 아니며 12지(支)로 따진다면 4500만 인구의 12분의 1은 운명과 재복이 같아야 옳다는 항변이다. 그러나 이점을 생각해야 한다. 샤머니즘도 연구보존 학문(민속)으로 받아들이는 판에 풍수지리는 더욱 소중하게 연구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지관’이나 풍수지리를 폄하하는 층에서도 살아서는 좋은 환경, 그런 길지(吉地)를 탐하고 죽어서는 명당에 들어가길 원한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납골당 타령을 하던 대권주자들도 명당을 찾아 이장(移葬)을 했지만 아직은 이렇다 할 기적이 없는 듯하다.
賻儀의 여러 형태
묘지선정에는 ‘지관’이 개입하기 마련인데 지금도 명사와 재벌들은 ‘지관’에 의뢰, 명당을 찾아다닌다. 먹고 살만한 집안에선 사랑채에 ‘지관’을 한두 달 불러들여 진한 주효(酒肴)에 넉넉한 사례비를 쥐어주고 칙사(勅使)대접을 하며 주변의 명산을 누비고 다녔다.
옛날엔 도장(盜葬)이라는 게 성행 ‘좌청룡, 우백호’를 만나면 그곳에 밀장을 하는데 그 방법이 교묘해서 유골을 챙겨가 그곳에 묻고는 떼장(잔디)을 덮어 감쪽같이 원상복구를 한다. 밀장을 하고는 한 줌의 흙을 남기거나 흔적을 보여선 안 되기 때문이다. 드러난 흘린 흙도 홑 이불에 싸가지고 돌아온다. 밀장이 들통 나면 산주가 그것을 파헤치기 때문에 실묘를 하는 예가 허다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부조[賻儀]형태다. 재벌과 명사들의 애경사에는 식장과 집 둘레를 조화로 에워싸는 경우를 본다. 호화판 장례, 문상객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는 경우 그것은 과시요, 세 자랑이었다. 간혹 고위직의 경우 뇌물성 부조에, 현직에 있을 때 서둘러 혼례를 치러 한 몫 챙기는 예도 있었다. 애경사에 있어 서로 내왕, 경조 의를 표하는 건 미덕이지만 여기서 실리 같은 걸 앞세운다면 그것은 자랑할 일이 못된다.
일본에도 고오뎅(香典)이라 해서 부조(장례의 경우) 행위는 있지만 친척과 친지 100명 선을 초청한다. 부의금은 3000~5000엔이 통례라 했다. 면식 있는 국회의원(참의원) 결혼식에 가본 일이 있는데 100명 남짓에다 집에서 식사 접대하는 건 10명 남짓이었다. 축의금은 10만원선…. 우리 같으면 지역구에서 버스를 대절, 군중집회처럼 요란을 떠는데 이렇듯 나라마다 풍속은 다르며 장단점을 안고 있는 셈이다.
지난날 이 땅의 서민들도 애경사 때는 외롭지가 않았다. 이웃에 초상집이 생기면 온 마을이 동원, 부조[賻儀]를 하는데 누구는 묵과 팥죽을 콩나물시루, 장작(땔감)까지 지고 오는 그런 정경을 연출했다. 또 친분 있는 아낙네는 상주 틈에 끼어 울어주기도 했다. 마을엔 위친계(爲親契), 상포계, 의형제계에서 총출동 장례를 치렀다. 어디 그뿐인가. 발인(상여 메는 사람)도 서로가 앞장을 섰다.
죽은 사람이 ‘장티푸스’나 ‘이질’ 등 전염병으로 죽었다 해도 몸을 사리지 않고 대들어 상여를 메었다. 때로는 촌극도 벌어졌다. 상가의 친척이나 사위 중 변변한 얼굴이 보이면 돌다리나 삼거리에서 상여가 멈춘다. 이를 알아차리고 돈 봉투를 쥐어주면 상여는 다시 움직인다. 또 이 시각 쯤 되면 산역(묘파기)패가 따로 있어 상여를 기다린다. “어허이!”, “어하!”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이렇게 상여는 동구 밖을 빠져 나갔다.
예령과 구슬픈 노래는 상여꾼들의 보조를 맞추는 음계로 외나무다리를 건너며 곡예까지 연출한다. 이것이 서민들의 장례형태요,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마을 주민의 상부상조, 이웃과 정분을 유지하는 원동력이기도 했는데 이제는 시골에 가도 그런 정경을 찾아볼 수가 없다.
젊은이는 모두 도심으로 빠져나가 노인과 아녀자만이 남아 있는 농촌…. 이웃사람의 죽음을 슬퍼해줄 호곡사(號哭師)도 없거니와 상여를 메줄 사람도 없는 그런 터전으로 변해 있다. 그래서 장례문화와 지관의 위치, 풍수지리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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