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것은 특정분야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책임인 것이다. 우리들이 곧 가해자요, 우리들 자신이 붕괴의 원인을 제공한 주인공임을 자각하는 일이다. 지식기반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지성인들은 누구나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르네상스 이래로 지성은 구원의 지, 교양의 지, 과학의 지 등 세 형식으로 존재해왔다. 구원의 지는 자기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지혜라면, 교양의 지는 인격창조의 예술적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의 지란 작업의 능률화를 추구해왔다.
그러나 오늘 지성의 존재양식은 달라졌다. 지난해 작고한 20세기 최고의 경영학자인 피터 드러커는 ‘자본주의 이후 사회’라는 그의 저서에서 변화된 지식의 의미를 정립했다. 지식이 생산수단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행동화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전문적인 것이어야 하며, 진보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따라서 지식의 생산 수단화는 인간의 내면적 변화를 유도하는 자기열반 또는 인격 창조의 지를 고전적 지식으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시대의 흐름, 경향성(Trend)을 반영한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고전적 지식의 포기란 종착역을 모르고 달리는 기차와도 같기 때문이다. 목표의 지를 상실한 채 방법의 지만이 난무하는 사회는 지성의 위기를 맞고 있는 증거인 것이다.
문호 톨스토이는 삼십 후반에 전쟁과 평화를, 사십 후반에 안나 까레리나를 쓰고 심각한 사상적 회의에 빠졌다. 이른바 지천명, 오십에 접어들면서 정신적 대지진을 치렀다. 1878∼80년까지 인생의 참 가치가 무엇인가를 발견하지 못한 채 문학을 했다는 것은 참회해야할 조건임을 알았다. 성공한 작가로서 세계적 문호의 반열에 오르기에 족했을 그가 왜 참회의 늪으로 자신을 끌고 들어가야 했을까. 그는 참회록에서 보여준 바와같이 철저한 구도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사악한 것들에 대한 비폭력 무저항의 정신을 찾아낸 것이다. 이는 간디의 사상적 바탕이 됐고 부활을 탄생시키는 기저가 된 것이다.
오늘 우리의 지성은 참회할 줄 모른다. 참회할 줄 모르는 지성은 모두 가해자이거나 지성의 위기를 자초한 장본인일 수 있다. 부활의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찾아낸 것은 자기 자신이 가해자라는 사실이었다. 일시적 방탕으로 빚어낸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서 까추샤를 따라가 그는 청혼의 손을 내민다. 죄책감을 벗어던지기 위해 청혼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냉담한 반응에 좌절하면서도 끝내 까추샤를 포기하지 않는다.
철저한 참회의 정신인 것이다. 그러나 까추샤는 사상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정치범 시몬슨과 결혼을 약속하고 이를 선포, 불행했던 까추샤가 결혼이라는 구원을 통해 재생하는 그 자체로서 작가 톨스토이는 부활의 주제로 삼은 것이 아니다.
진정한 죄인은 무고한 저들을 죄수로 만든 가해자인 자기 자신인 것을 깨달으며 참회없이는 인생의 참 가치를 찾을 수 없다는 그 영혼에 이는 바람소리를 듣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 지성의 위기는 철저히 참회함으로써 극복될 것이다. 이 부활의 봄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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