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했던 식민지시대 ‘현실 탄식조’ 주류
군사정권 ‘동백아가씨’ 등 금지가요 지목
충청지역 박동진·심수봉 등 실력파 다수
짧은 연휴의 명절탓에 귀성, 귀경길이 그 어느 해보다 붐볐다. 1500만대의 차량과
더러는 휘파람과 콧노래로 나훈아의 ‘고향역’, 김부자의 ‘어머님 안심하소서’, 고복수의 ‘타향살이’를 흥얼거린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대중가요는 늘상 대하는 밥상처럼 늘 반갑고 모두의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 준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따금 이 대중가요가 어찌하여 일본 ‘엔카’를 닮았는지, 전통노래(민요, 판소리, 시조)에서 분파된 이유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1920년대의 일들이지만 ‘엔카’를 닮은 것은 그들의 식민지하에 우리가 살았기 때문이다.
‘5선지’를 접한 것도 그때일로 우리는 서구문화를 직수입할 입장이 못 되어 내키든 아니든 일본 것을 받아들인 역사성을 갖고 있다. 대중가요 뿐 아니라 문학, 체육, 미술(양화) 전반이 그러했다. 1925년 조선 소리판에 당시 유행했던 일본노래 센도고우다(船頭小唄)를 부른 것은 소리꾼 도월색(都月色)이었다. 그 시대는 전업가수가 없었던 탓에 명기(名妓), 명창(名唱)들이 일본에 건너가 노래를 취입했다. 곤지키야샤(金色夜叉)를 부른 김산월(金山月)도 같은 케이스로 명기, 명창들이 이렇듯 밀어닥치는 물결에 선구 역할을 했다는 건 눈여겨 볼 대목이다.
유성기(留聲器)시대
이렇게 해서 레코드 취입이 이뤄지며 유성기 시대를 여는데 일인들은 그것을 지쿠옹키(蓄音器)라 불렀고 조선전체를 그들의 음반시장으로 삼았다. 우리 조선에선 그것을 유성기(留聲器)라 했다. 이때 ‘타향살이’, ‘사막의 한(손목인 작곡)’을 OK레코드가 내놓자 크게 히트를 하는데 한 발 앞서 고복수는 1932년 신인가수 발굴 대회에서 3위에 입상, 앞날을 약속받은 셈이었다. 여기서 가수시대가 열리며 연극배우들이 다투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 복혜숙(卜惠淑)과 전옥(全玉), 윤심덕(尹心悳) 등 여류들이 길을 열었다. ‘유성기’ 시대가 이렇게 열렸지만 우리의 대중가요는 일본 엔카와 접목(?)을 하면서 개중에는 이를 부르는 바람에 일본 ‘엔카’를 번안(유입), 국적 없는 가요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 무렵 일본 엔카(酒は淚か 嘆息か)를 조선가수가 ‘술이란 눈물이냐 한숨이냐’를 불러 크나큰 반향을 일으킨 일도 있다. 저명한 문인, 김안서(金岸曙), 이하윤(異河潤), 조명암(趙鳴岩) 등이 대중가요를 작사해서 세상을 놀라게 한 것도 이때였다. 대중가요가 대두하기 전 이미 레코드가 있었지만 그 때는 민요와 판소리, 시조, 찬불가 같은 게 주조를 이뤘으나 얼마 안 가 신가요(대중)가 이를 추월해 버렸다. 이렇게 해서 고개를 든 유성기는 전국방방곡곡에 보급되어 농촌에서도 행세하는 층은 다투어 이를 장만했다.
식민지 시대 그토록 고통 받는 세월이었지만 유성기는 날개를 돋친듯 팔려나가 그것은 부의 상징이며 세도(勢道)의 한 척도기도 했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이 몰려와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유성기를 혼수로 지참하면 일등 며느리 감이라 했다. 1940년을 전후해서 크게 활약한 가수로는 ‘진주라 천리길’의 남인수, ‘타향살이’의 고복수,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 ‘눈물젖은 두만강’의 김정구, ‘고향설’의 백년설, 황금심, 이화자 등이었다.
하지만 1941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조선어 말살정책을 펴자 우리가요는 지하로 잠복하며 일본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늘어났다. 대표적인 예가 ‘백년설’로 그는 ‘아들의 혈서’를 불렀다. 이는 친일행각에 다름 아니었다. 그 때의 우리 노래
박정희 18번은 ‘황성옛터’
연회장이나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를 때 “아무개 씨의 18번을 듣겠습니다”라고 소개하는 경우가 있다. 박통의 18번은 ‘황성옛터’, 노통 18번 ‘베사메무초’, 모 기업가는 ‘조선팔경가’ 또 누구는 ‘서머타임’이 18번, 이런 식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이 ‘18번’이란 우리 가요사전에는 없는 말로 일본에서 들어왔다는 걸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일본에서 “이 가수의 18번입니다”라는 말을 흔히 듣지만 이 또한 일본 엔카(演歌)의 소산은 아니고 가부키(歌舞伎)에서 비롯한 낱말이다. 이를 캐보면 의외로 깊은 곳에서 유래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가부키란 무엇인가. 일본이 가장 일본적인 연희라 자랑하는 것으로 중국의 경극(京劇), 한국의 남사당(男寺堂)과 같은 토착적인 무대를 말한다.
바꿔 말하면 에도(지금의 도쿄) 가부키의 비조 이치카와(市川團十郞)의 가예(家藝), 18종목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18번은 18종을 뜻하지만 현재 공연하는 종목은 절반선이라고 한다. 그럼 왜 18종목으로 국한시켰는지 그 까닭은 분명치 않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건 불교에서의 18대경(大經), 무여(無餘) 18번이라는 불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나루가미(鳴神), 시바라쿠(暫), 강우(關羽), 나나츠맨(七っ面), 게다즈(解脫), 자야나기(蛇柳), 간진죠(權進帳) 등 18곡목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는 개항(開港)과 동시에 일본식민지 치하에 들어서며 각 분야가 그들의 영향을 받아 왔음을 부인할 길이 없다. 종교이외의 것, 모든 분야가 그러했기 때문에 대중가요 역시 그들의 ‘엔카’를 닮을 수밖에 없었다. 레코드 제작과 가요의 가사, 창법(비부라도의 기교) 역시 닮은 데가 많아 80년대까지도 그들의 가요를 번안해서 부른 가수가 있었다.
해방에서 오늘까지
해방을 맞아 우리말을 되찾으며 기성가수들이 활약을 벌이는데 ‘현인’이 상해에서 돌아와 ‘신라의 달밤’을 불러 인기를 누리자 남인수는 ‘가거라 38선’을 들고 나왔다. 이 때 신인가수들이 ‘미8군’, 전속무대에 올라 ‘현미’ 등이 활약을 했으며 이 때 ‘샹송’, ‘탱고’, ‘팝’ 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후 6·25가 발발해 ‘종군연예단’이 활약, ‘전우야 잘 가라’, ‘단장의 미아리고개’,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은 국민의 애창곡이었다.
60년대 군사정권(5·16)에선 ‘엔카’조의 가요나 퇴폐성 노래 같은 걸 제지하고 나섰는데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양희은의 ‘아침이슬’ 등이 금지되었다. 또 한 가지 대중가요하면 ‘딴따라’라 해서 폄하하던 시절이야기다. 그때 한상일이 ‘웨딩드레스’를, 최희준의 ‘하숙생’, 김상희의 ‘대머리총각’ 등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들은 모두 명문대 출신으로 그 신선함에 박수를 받았다.
이때 건전가요를 장려하기 위해 MBC의 ‘대학가요제’가 신선감을 안겨다 주며 새로운 흐름을 형성한다. 80년대 전후해서 국제가요제에 출전, 수상을 한 가수로는 정훈희, 김상희, 혜은이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조용필은 아시아 5개국 가수 중 최고상을 받아 명성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엔카’ 왕국으로 군림해온 일본을 이미자, 조용필, 김연자 등은 쓰나미(津波)처럼 일본열도를 강타했다. 이 또한 한류에 다름 아니다.
현재 가요계의 스타(국민가수대접)로는 ‘패티김’, ‘이미자’, ‘조용필’, ‘현철’, ‘송대관’, ‘태진아’, ‘설운도’, ‘남진’, ‘나훈아’ 등이 기라성처럼 자리하고 있다. 음반판매량으로 따지면 조용필과 패티김, 이미자 순이 아닐까 싶다. 문제는 대중가요를 평가함에 사시적(斜視的)인데가 있다는 점이다. 대중가요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촉매제일 뿐, 순수예술과는 떨어져 있다는 논리다. 이는 ‘본격’과 ‘통속’이라는 이분법(二分法)에 기인한 것으로, 또 한편으로는 민중가요와 대중가요(유행가)를 놓고 비교하는 경우라 하겠다.
대중가요는 감상과 낭만은 있으나 뼈대(이념)가 없고 민중가요엔 사상은 있으나 서정(抒情)이 미흡한 게 흠이라는 뜻이다. 본격과 통속관계의 논쟁도 이에 다를 바 없지만 요즘에는 ‘소프라노’가수도 유행가수와 한 무대에 서는 경우가 잦다. 오늘에 와서는 신세대가 돌풍을 몰고와 ‘SG워너비’, 김종국 등이 10대들의 우상(偶像)으로 오빠부대를 끌고 다닌다. 그러니까 우리 가요는 1920년대 민요조에서 신가요 - 팝 - 랩으로 이어지며 국민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쉰다.
충청권의 노래와 가수들
이 고장엔 예부터 노래와 춤,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왔다. 백제터전이었던 이 고장에는 그래서 ‘산유화가(山有花歌)’, ‘매화타령’, ‘아리아 타령’ 등의 노래가 전해져 온다. 대표적인 노래로는 ‘산유화가’지만 그것은 ‘노동요’다. / 산유화혜/ 산유화야/ 저 꽃 피어/ 농사일 시작하여/ 저 꽃 지도록 필역하세/로 시작, 후렴 / 얼럴 널널/ 상사디어 상사 뒤/ 산유화 혜/ 산유화야 저 꽃 피어/ 번화함을 자랑마라/ 九十춘광 잠깐 간다./ 이렇듯 품격 높은 ‘노동요’를 부르며 농사지었던 백제의 후예들….
하지만 종장(終章)의 / 부소산이 높아 있고 /구룡포가 깊어 있다/ 부소산도 평지되고/ 구룡포도 평지되는/ 세상일 누가 알꼬/ 에선 애수와 한가닥 불안까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백제후예들은 격조 높은 노래를 부르며 살아왔으며 그와 같은 전통 덕에 뛰어난 ‘소리꾼’들을 배출한 바 있다. 판소리의 명인 박동진, 민요의 박재란, 김세레나, 대중가요는 고운봉, 조영남, 심수봉, 김국환, 배일호, 신승훈 등이 우뚝 서 있다. 이 고장을 소재로 한 가요로는 ‘칠갑산’, ‘백마강 달밤’, ‘수덕사의 여승’, ‘대전발 0시50분’, ‘만리포사랑’, ‘천안삼거리’ 등이 자랑거리다.
잘 나가는 가수들은 TV와 밤무대, 초청공연, 지방순회로 매니저들이 시간 짜 맞추기에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지만 이는 A급 스타들의 경우일 뿐 초심자나 무명 가수들은 기만원에 불려 다니는 경우가 있다고 하니 부익부, 빈익빈, 양극(兩極)화는 가요계가 더욱 심하다는 증거다. 지난날 대전도 그러했다. 60~70년대 극장에서 쇼가 있을라 치면 인산인해를 이루는데 이 경우는 김정구, 현인, 이미자, 한명숙, 박재란, 안다성, 송민도, 현미 등이 올 때 이야기고 2~3류 가수를 불러와 곤두박질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쯤 되면 가수들은 여관에서 발목을 잡히고 만다. 악기와 소지품은 여관에 잡혀 도주도 못하고 주룩주룩 추녀 밑에 떨어지는 빗줄기를 멍하게 바라보던 그 면면들이 떠오른다. 대중가요를 우습게 여겨온 지식인들도 이제는 점차 가까워지는 양상을 보인다. 국립대학들도 가끔 대중가수를 초청, 잔치를 벌이는 걸 엿볼 수 있다. 이렇듯 대중가요는 이제 우리와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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