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진실에 다가가려는 책 속 거짓말만이 아니라, 사실 설 연휴에 많은 거짓말을 접했고 본의든 아니든 스스로도 이 대열에 합류했을 것이다. 의례적 인사나 태도나 표정을 포함해서 평균 8분당 1번 꼴로 하루 200번 거짓말을 한다는 폴 에크만 교수의 실험례에 기대지 않아도 선의의 거짓말들이 타인에게 비호감도 줬을 것이다.
남이 하면 거짓말이고 내가 하면 창조적 광고라고 한다. 오프라인과 온라인도 같은 입장에서 딱히 규정할 수 없는 거짓말들을 양산했을 게 분명하다. 가령 섹시 댄스와 대중 나르시시즘에 휘둘린 대중은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표현을 빌려 잘 길들여진 부잣집 도련님처럼 철석같이 믿었을 테고, 평론가라면 이런 거짓말을 향해 '미적 가상에 대한 수사적 표현', '패러독스' 운운하며 거들었을지 모른다.
현실에서는 원천적으로 나쁜 거짓말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거짓말이 있다. 토끼를 용궁으로 유인하려는 자라의 거짓말과 목숨을 부지하려는 토끼의 거짓말은 의도와 성격에서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시대에는 또한 거짓말이 예의일 때가 있다. 말하자면 연휴 마지막날 방송된 고부간 설문조사 결과는 이 범주에 넣을 수 있겠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하는 거짓말 1위가 '어머님, 벌써 가시게요?'이며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하는 거짓말 1위가 '널 딸처럼 생각한다'라고 한다.
어떻든 미워할 수 없는 거짓말들이다. 시어머니의 '시(媤)' 자가 싫어 '시' 자가 들어간 시금치는 쳐다보기도 싫다는 식의 가부장적 한국문화에서 비롯된 거짓말에 분노도 하겠지만 그 거짓말에 분발하는 시어머니나 며느리도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관계를 매끄럽게 하려고 윤활제로 쓰인 거짓말에까지 도덕의 잣대를 들이댈 필요까지는 없다. 거짓말도 상상력의 한 줄기다. 코끼리를 본 적이 없던 고대 중국인들은 코끼리의 뼈를 보고 그 모습을 그렸다. '상상(想像)'이라는 말은 그렇게 태어났다. 상상의 상(像)은 코끼리의 상(象)과 같은 글자였다. 상상은 이처럼 즐거운 것이다.
거짓말 예찬론은 아니다. 그러나 거짓말이거나 상상이거나 기분 좋은 향내로 감돌기도 하고 악취를 풍기기도 한다는 비판적 옹호론쯤 된다. 자본주의 경제 및 자본시장에 참여하는 평균적 인간형인 '적당히 나쁜 사람(Moderately Bad Person: MBP)'들은 적당히 거짓말도 할 줄 안다. 거짓말에는 상식이라는 날개가 달려 있어야만 한다. 날개를 다는 순간, 상식이 되어 버리는 상상과 다른 점이다.
보통의 MBP들은 어떠한가. 자신은 정작 친구의 소소한 돈을 떼먹기도 하면서 국회의원들의 금품 수수에는 분개한다. 개념 없는 거짓말로 일관하지만 않는다면 이런 살짝만 나쁜 사람들이 세상을 세상답게 채색하기도 한다. 거짓말도 잘 쓰면 약이 된다. 잘못 쓰면 당연히 독이다. 제1차 오일쇼크 때 화장지가 동이 났다는 거짓말에 주부들이 너도나도 상점에 몰려 소문이 실제가 된 적도 있었다.
이것을 예언의 자기파괴라 해두자. 이제 우리 사회 구성원의 감성적 커뮤니케이션에 이로운 거짓말을 듣고 싶다. 깨끗함을 추구하는 정치를 하겠다느니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한다느니 하는 대한민국 대표 거짓말들이 예언의 자기성취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다. 진리의 투명한 그림자 같은 거짓말, 정말 유쾌한 거짓말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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