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발 0시 50분’ 등 서민 애환담은 노래도 인기
6.25 전쟁 후 55년 북과 단절… 분단 아픔의 초상
고속철 KTX 등장… 해저터널 등 세계 연결 기대
설 물가가 15%나 올라 5인 가구 당 20만원선을 웃돌 것이라는 분석이지만 이와는 상관없다는 듯 마음은 벌써 고향에 가 있는 듯하다. 올 연휴는 3일뿐으로 철도,
열차 표는 이미 예약이 끝났다고 한다. 고속도로는 서울~부산 간 20시간, 서울~목표는 19시간대를 예년 지켜 본 우리들이었다. 빠르고 쾌적하기로 따지면 새로 등장한 KTX(고속철도)가 으뜸일 것이다. 서울~부산 간 2시간 40분. 하지만 요금이 비싸 서민들은 선뜻 다가서질 못하는 경우가 있다. 안전도와 쾌적감, 시간절약 등을 생각한다면 고속철을 당할 자가 없지만 아직 타보지 못한 국민들도 상당수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속도로의 등장과 자동차의 발달, 그리고 항공기의 위세 앞에 한 때 사양길을 걷던 철도가 KTX 등장으로 아연 활기를 띠며 이들 ‘3자’는 이제 무한경쟁에 돌입했다. 우리 철도가 처음에는 일인들 손을 거친 것으로 생각하는 이가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구한말 우리 조정이 그 필요성을 실감, 부설계획을 세운 바 있었다. 개항(開港) 후 일본을 돌아보고 온 김기수는 일동기유(日東記遊)를 통해 섬나라 철도를 소개한 바 있고 이후 미국주재 한국대리공사 이하영(1889년)이 그곳 철도의 설계도를 가져온데 자극, 조정이 건설에 착수를 했다.
그 무렵(1896년 3월) 경인철도 부설권은 미국인 ‘모스’에게 맡긴 바 있고 같은 해 경의(京義)선은 프랑스인에게 주었으나 이행을 못해
鄭鑑錄파의 통곡
조선철도의 효시는 인천~노량진(33.2km) 구간으로 한강철교건설과 서울역 개점까지는 얼마간 시간이 걸렸다. 이 철도 개통식엔 조정의 문무백관과 일본 통감부 요인들이 다수 참석, 축배를 드는데 한강변
상투에 망건, 흰옷차림의 집단이 땅을 치며 통곡을 했다는 것인데 정감록에 ‘철마(鐵馬)가 한수(漢水)에 도래(到來)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예언 때문이었다. 그들은 단발령(斷髮令) 때도 결사항쟁하며 흰 두루마기, 흰 옷을 입지 말라고 일본순검들이 검은 물감을 뿌리자 이에 저항했던 바로 그 집단이었다. 철도의 효시는 16세기 독일광산에서 비롯한 것으로 처음엔 목제 레일을 깔았으나 중량을 못 이겨 마모가 심했다. 이에 영국인 스티븐슨이 로커모션호를 개발한 것이 세계 최초의 증기기관차인데 철도가 빛을 보기 전 미국에선 열차를 말이 끌고 다니는 진풍경까지 연출했다.
영·미에 이어 유럽각국이 다투어 철도를 개설하자 아시아에선 인도, 일본, 중국, 한국이 그 뒤를 따랐다. 그것은 1850년부터 19세기 말까지 50년 사이의 일이다. 하지만 2차 대전이 끝나고 열강들이 자동차를 비롯 대형선박, 비행기 쪽에 눈을 돌리자 철도는 어려운 국면을 맞게 된다. 하지만 한 때 불황을 겪던 철도는 갖가지 장점을 앞세우며 재기를 한다.
철도는 ① 비행기와 선박보다 정확성이 크고 일기와 상관없이 운행이 가능하며 ② 레일 위를 달리기 때문에 안전은 물론 고속주행이 가능하고 ③ 연료소비가 적으며 ④ 수송에 따르는 배기가스의 축소 ⑤ 철도주변 개발이 용이한 데다 문화 교류에 도움이 되고 ⑥ 전시에는 군사물자 수송이 용이하다는 장점을 갖는다. 그 후에 고속철도의 출현으로 철마(鐵馬)는 제2의 황금기를 맞고 있다. 현재 프랑스, 독일, 일본, 한국, 스페인 등 5개국이 고속철도를 보유한 나라다.
한 때 우리 주변에선 일본의 신칸센(新幹線), 프랑스의 TGV, 독일의 ICE를 타본 사람들이 귀국 보고회와 술자리에서 자랑삼았다. 우리 KTX는 모델이 프랑스 TGV인데도 한국형(독자성)을 가미, 오늘날 여러 나라의 자문에 응하고 있어 보기에 흐뭇하다. 구조가 2층으로 된 프랑스 TGV나 일본의 신칸센에 뒤처지질 않는다는 것이다. 고속철을 보유한 나라들 모두가 그러하듯 우리 고속철은 흑자운영을 한다고 철도당국은 자랑한다.
일제, 철도부설은 수탈용
우리 철도는 한·일 합방(1910년)을 기점으로 일제에 의해 경부선에 이어 호남선(1914년), 경의선(1911년), 함경선(1928년) 순으로 추진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중국대륙 침공을 목적으로 국경지대에 혜산선(惠山線), 평원선(平元線), 만포선(滿浦線)을 깔았다. 그리고 태평양전쟁 중에는 경경선(京慶線), 중앙선(中央線)이 완성되었고 이어 사설철도[支線]가 등장을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천안~장호원 간의 협철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았던 6·25전쟁의 발발로 철도 전반이 파괴되었으나 전후 복구와 60년대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 힘입어 발전가도를 달려왔다. 처음에는 ‘증기’기관차에서 ‘디젤’기관차로, 그 다음엔 ‘전기’기관차로 대체했다가 냉난방 시설을 갖춘 초특급(새마을호)시대를 맞이했다. 새마을호는 서울~부산 간을 4시간 10분에 주파해 왔으나 KTX의 등장으로 그 인기는 반감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철마는 안타깝게도 국토의 하반신(下半身)만 달리는 그런 상황에 놓여있다. 휴전선(철원) 비무장지대에 가면 녹슨 기관차가 레일에서 벗어난 채 주저앉아 있는 모습을 우리는 보아왔다. 55년간 그 모양 그 꼴을 하고 있다. 신문,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이 기관차의 표제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였다. 이는 분단의 소산이지만 한민족 모두의 초상(肖像)에 다름 아니다. 북한에서도 철도는 운송체계의 근간으로 되어 있다는 보고가 나와 있다.
항공 및 자동차산업이 뒤져있는 북한으로서는 반사적으로 철도의 비중이 크다고 한다. 그러나 노선의 노후, 인구의 이동과 물동량의 한계 등으로 정체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얼마 전 우리는 남북철도의 원활한 운영을 겨냥 경원선 선로연결을 마무리한 바 있다. 북한의 교통체계는 철도 이용률이 62%, 도로는 37%, 해운 1%라고 했다.
철도엔 한민족의 애환이
철도는 국토의 혈관(대동맥)이요, 문명의 이기(利機)라지만 한민족에겐 더 없이 슬프고 뼈아픈 그런 역사를 안고 있다. 일제 때 수많은 동포를 징병, 징용 또는 위안부로 열차에 실려 대륙으로, 남방으로 보내는데 이 철도를 이용했다. 피땀 흘려 지은 쌀도 이 철도를 통해 빼앗아 갔고 대신 만주에서 ‘콩깻묵’을 실어와 우리 민족은 허기진 배를 달래야 했던 그 아픔. 어디 그뿐인가. 금테안경에 스틱을 내저으며 이 땅에 들어온 지배자들도 이 철도를 이용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어이없는 일도 있었다. 동경 유학생(조선인)이 방학 때 서울의 저 유명한 명월관(明月館) 기생을 대동, 원산 ‘송동원’ 해수욕장을 가기위해 특석에 앉아 거드름을 떨었다는 사례….
그런가 하면 소작농마저 빼앗기고 남부여대 땟국이 흐르는 이불보따리를 들쳐 메고 화차에 올라 고향을 향해 울부짖는 모습도 그 시절의 철도와 무관치 않았다. 철도에 대한 애환을 꺼내다 보면 노래이야기 또한 빼놓을 수가 없다. 일인들은 그 시대 ‘조선철도 창가(唱歌)’라는 걸 신나게 부르며 또 그것을 보급했다. ‘サギリ[朝霧:아침안개]는 개었는가. 부산항’으로 시작, 경부선 도시들의 특징을 나열하며 대륙침공의 꿈을 키웠던 일인들이었다.
반면 우리도 노래는 불렀지만 그것은 대부분 애조(哀調)를 담은 최루탄(催淚彈)물로 ‘만포선/구불구불/육로 길은 아득한데/철쭉꽃 국경선에…’라거나 해방 후에는 ‘이별의 부산정거장’, ‘대전 발 0시50분’, ‘비 내리는 호남선’ 등이었다. 또 있다. 어느 시인은 ‘나의 고향은 급행열차가 서지 않는 곳’이라는 작품으로 박수를 받기도 했다. 우리 철도사에서 잊을 수 없는 사건도 있었다. 첫째는 6·25전쟁 때 한강교 폭파사건으로 ‘도강파’, ‘비도강파’로 나뉘어져 그 아픔은 오랜 세월 우리를 괴롭혀 왔다. 그 다음은 60년대 일로 이리(裡里) 지금의 익산(益山)역 주변이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변했다. TNT를 만재한 열차가 정차 중 돌연 폭발한 때문이었다.
KTX는 세계로 통한다
철도와 역(驛)에 얽힌 일화는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우선 떠오르는 것은 광주학생 사건이다. 열차 안에서 일본학생이 조선여학생을 멸시하는데 분개, 광주학생들이 일으킨 소요로 그것은 항일투쟁이었다. 그와 같은 전통은 훗날 4·19 학생혁명으로 이어지며 오늘에 빛을 발하고 있다.
이와는 성격이 생판 다른 일제 때 대전역에서 있었던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일본총독이 대전역에 도착하자 기인(奇人) 김갑순이 마중을 나갔다. 홈을 걸어 나온 총독이 보문산을 가리키며 산세가 아름답다고 하자 김갑순이 선 뜻 이렇게 응수했다. 보문산에는 나무가 총총 들어차 있다고 응답한 것까지는 좋았다.
어설픈 일어솜씨로 대충 앞뒤를 꿰맞춘 셈인데 ‘총총’이라는 표현을 ‘뎃보, 뎃보’라 해서 주위를 어리둥절케 했다. 뎃보란 일본어로 ‘총(銃)’을 말한다. 그는 호피판사의 아버지로 금 명함을 갖고 총독면회를 청했던 인물로도 유명하다. 전성기 때 그는 1000만평의 땅을 소유했던 토호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총독 옆에 바싹 붙는 그에게 “무슨 청탁이라도 있소?”라고 묻자 “없습니다. 각하”라고 전제한 뒤 귓속말로 도지사를 접견할 때 “김갑순이 잘 있는가?”라는 한마디만 해달라고 했다. 요즘도 심심찮게 나도는 일화로 사실여부를 캐물을 필요는 없다.
열차 안에선 늘 서민의 향수를 자극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안의 명물 호두과자가 있습니다. 울릉도 오징어도 있구예~. 따끈따끈한 호빵은 어떻십니껴?” 갱생회 판매원의 그 외침…. 그리고 대전역 구내의 우동 또한 명물이었다. 승객들은 5분 정차 시간을 이용, 열차에서 내려 눈 깜짝할 사이에 우동을 먹어 치우고는 다시 승차를 했다. 이렇듯 우리의 한(恨)과 정(情), 그리고 향수(鄕愁)를 담고 있는 게 철도요, 정거장이다.
앞으로 우리 철도는 북한의 그것과 연결, 러시아, 중국, 동남아로 이어져야 한다. 이에 대해 일본도 우리와 견해를 같이 하는데 이미 일제 때 부산~시모노세키(下關) 해저터널을 구상했던 그들이다. 또 일본은 아오모리(靑森)~하코다데(函館) 해저터널을 완성한 경험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는 ‘도버’해협 터널을 거쳐 유럽 각국 철도와 연결시켜 놓았다. 이렇듯 세계는 고속철시대를 맞이했다. 이 철도건설은 한·일·중 뿐만 아니라 전 인류가 공유해야 할 대동맥이라 하겠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