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춘추] 단풍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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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춘추] 단풍나무

  • 승인 2006-01-20 00:00
  • 김백겸 시인김백겸 시인
김백겸 시인. 민족문학작가회의 대전. 충남지회장


내 직장인 원자력연구소 정읍 분소에 근무하게 되면서 단풍나무를 많이 본다. 내장산의 전매특허인 단풍은 정읍시 정책으로 가로수로 심겨지는가 하면 밭에는 상품으로 단풍나무를 재배한다. 산책길에서 본 지난 가을 단풍나무 숲의 아름다움은 또 다른 발견이었다. 단풍의 붉은 색은 화려하면서도 슬펐고 장엄했다.

단풍을 구경하기 위해 내장산으로 전국에서 수많은 인파가 몰려왔다. 사람이 인사인해인지 단풍이 인산인해인지 구분이 어렵다. 젊은 청춘은 드물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로 이루어진 단풍 같은 나이의 사람들만 모인다. 척 보면 내 편인지 적인지 아는 노련한 전략가처럼 단풍나무를 보고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단풍은 붉은 얼굴의 아가씨처럼 추파를 던지나보다.

단풍은 목숨의 마지막 비명이며 죽음을 앞둔 환자의 피로 그린 풍경의 은유이다. 단풍이 떨어지면서 나뭇잎이 붙들고 있던 생의 자리에는 구멍이 생긴다. 그 구멍은 허무이며 어둠이다. 역사상 어떤 영웅이나 신도 이 구멍을 피하지는 못했다. 불사의 신들이 있다고는 하나 인간의 의식과 문명이 꺼질 때 신의 몸에도 구멍이 생긴다. 이집트의 오시리스와 북구제국의 오딘과 바빌로니아의 아몬과 중국의 삼황도 문명의 몰락과 함께 박물관의 화석으로 돌아갔다.

세계는 구멍 투성이다. 인식이 깊고 넓어질수록 단단한 벽이라고 믿었던 가치와 의미의 집에는 어두운 바람이 귀신의 소리와 함께 들어온다. 시간의 강에 빠진 목숨이여, 깊은 어둠이 네 발목을 잡는다. 시는 구멍에 빠지지 않으려는 네가 필사적으로 붙잡은 연꽃 한 송이다. 연꽃의 부력이 네 정신을 얼마나 지탱하겠는가. 흐르는 물에 뜬 네 목숨은 연꽃이 질 때 구멍으로 빨려 들어간다.

단풍나무가 신화의 나무라고 상상해보자. 장자의 우화에 나오는 나무처럼 공간에 뿌리를 내리고 시간의 잎새를 피운 큰 나무 즉, 세계나무라고 가정을 해보자. 나무는 우주 봄의 시간에 푸른 잎을 피웠다가 가을 시간에 붉은 잎을 피운다. 아주 긴 시간이어서 인간의 경험과 지식으로는 그 규모를 짐작할 수가 없다. 봄의 시간은 황금시대라고도 하고 에덴의 시간이라고도 하는 유토피아시대다. 까마득한 과거여서 구전으로나 전해 내려오는 이미지로 짐작할 뿐이다.

우주시간에서 현 시대는 가을의 시간이다. 행복과 즐거움대신 고해의 생을 산다. 죽음이 인간의 의식을 위협하는 이 상황을 석가는 화택(火宅)이라고 명명했다. 세상이 모두 불타는 세계. 은유하면 단풍나무가 불타는 모습이다. 형상은 아름다우나 본질은 죽음이 주인이다. 지하의 어둠이 단풍나무 뿌리를 타고 올라오면 단풍은 하늘의 시간에서 땅의 시간으로 내려 앉아야한다.

그러나 단풍은 새봄에 다시 푸른 잎이 나오는 순환을 기다리는 자에게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시간에 몰입되지 않고 시간을 비껴선 자에게 주어진 특권이며 미학이다. 내 인생도 어느덧 단풍을 쳐다보며 비감해하는 시절로 접어들었다. 붉은 단풍 한 잎으로 달려있는 나를 쳐다보는 당신의 눈은 하늘의 태양인가 달인가. 나는 당신의 마음속에 불꽃과 눈물을 일으킨 지금 여기의 기쁨인가, 단풍나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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