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진의충청비사>메마른 農心에 녹색의 꿈 일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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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농촌엔 주역이 없다

  • 승인 2006-01-19 00:00
  • 前 중도일보 주필前 중도일보 주필
60년대 대전. 충남권 농업인구 80% 달해 ‘상록수’ 심훈 등 지식인들 농촌계몽 앞장
수출지상주의에 직격탄… 농촌몰락 심각 부채탕감. 식생활개선으로 넉넉한 농촌을




분노한 농심이 고속도를 점거, 볏 가마에 불을 지르더니 국회의사당에 진입을 시도
하다 경찰과 충돌, 사상자를 내는 불상사를 일으켰다. 그 바람에 경찰총수가 사퇴를 했지만 성난 농심은 홍콩까지 원정, WTO 회의장 시위 로 전원 재판에 회부, 벌금을 물고 풀려나는 사태까지 몰고 왔다. ‘그것이(농촌보호) 아니거든 죽음을 달라!’는 식의 항쟁이었다. 자살한 농민까지 있었다. 그것은 시위가 아니라 통곡이며 객혈(喀血)인 동시에 만가(輓歌)였다. 그리고 그간 농정은 “회색(灰色)바탕에 회색문자로 써진 우화(寓話)” 쯤으로 비쳐졌다.

우리는 70년대에 이르러 ‘보릿고개’를 넘겼지만 이는 식량 증산을 국민운동으로 전개한 성과물에 다름 아니었다. 중앙청 옥상에 흙을 실어다 메워 놓고는 콩을 심고 물을 주는 일까지 있었다. 그때는 덴마크의 ‘달가스’와 ‘그룬트비히’가 농민들의 우상이었으며 ‘전쟁으로 잃은 땅을 삽으로 되찾자’는 그들의 구호를 주문처럼 간직할 때 일이다. 간척의 나라 네덜란드의 ‘꽃시장’과 피터 소년의 전기를 교과서로 삼던 시대….

그 무렵 ‘이스라엘’의 키부츠(Kibbutz)와 ‘모사브오브팀’ 그리고 ‘모사브시투피’의 집단 농장을 연구하는 지도자까지 등장을 했다. 그 바람에 식량자급(自給)시대를 열었지만 농촌의 비운은 이때부터 서서히 다가서고 있었다. 중공업 시책과 수출 지상주의 깃발 아래 농촌은 불황을 맞았는데 이는 세기적 추세였다. 작금의 우리 농촌에는 주역이 없다. 어느 TV 프로에서 “우리 동네에선 내가 막내요. 60중반인데…”라는 이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인도에서 유래한 벼농사

벼농사가 구석기시대(6000년전)부터라고 하니 우리의 시조 단군이 씨앗을 갖고 강림했다는 설은 그래서 설득력을 갖는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6000년 전에 농사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 쌀은 존재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야생벼’였을 것이다. 벼농사가 한반도로 건너온 경로를 인도 → 중국의 양자강(楊子江)유역 → 산동(山東)반도 → 한반도 한강 이남이라는 게 정설로 되어 있다.

인도는 인류문명 4대 발상지의 하나로 우리에게 불교(佛敎)까지 전수, 그것을 백제가 일본에 전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 이 쌀(벼농사) 역시 한반도를 거쳐 규슈(九州)로 들어갔는데 그것을 ‘자폰스키’ 도작(稻作)문화라 말하는 이가 있다. 문화란 발상지에 머물지 않고 나들이 길에 나서는 속성을 지녔다는 말이 있다. ‘문명의 출분벽(出奔僻)’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쌀에 관해선 여러 지방에서 캐낸 탄화미(炭化米)가 지난 역사를 말해준다.

가깝게는 부여 부소산에서 나온 탄화미를 비롯 중국양자강 유역의 6000년전 것과 경기도 일산의 5000년 전 것, 김포에서는 4000년 전 탄화미가 나왔다. 원래 벼는 인도와 아프리카가 그 원류지만 인도 것은 중국, 티베트, 한국, 일본, 태국, 미얀마, 마라이, 베트남 등이 주산지이다. 아프리카 벼는 중동일각에서 재배해 오다 유럽의 밀[小麥]생산국들이 빵 문화를 형성하자 벼는 벽에 부딪혀 더 이상 진출을 못했다.



흙에 애정을 쏟았던 작가들

지구상엔 5억 이상의 인구가 굶주리고 있는 상황인데 강대국들은 보란 듯이 ‘식량무기화’를 서슴지 않고 있다. 예로부터 벼농사에 매달려온 우리 민족은 쌀에 대한 집념과 애정이 남다른 데가 있다. 지난 1960년대까지 대전·충남 권엔 이렇다 할 산업체가 없었기 때문에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를 해왔다. 그 시대 산업체하면 대전의 이연공장과 동아연필, 천안의 성냥공장, 논산의 조화(양조장), 천안 직산의 사금(砂金), 공주 유구의 인조공장, 장항 제련소, 예산의 과수 등이었다.

그러니 농업은 근본이며 최선, 최량의 생업수단으로 토호(부농)와 소작인이 양극을 이루며 갈등을 드러내기도 했고 일제식민지 때의 약탈의 참상은 이루다 표현할 길이 없다. 우리는 그 시절 일본 본토인을 먹여 살려야 했고 군대 식량의 보급기지로 온갖 수탈을 감내하며 만주에서 들여 온 콩깻묵[大豆粕]으로 허기를 달래야만 했다. 하지만 암울했던 그 시대에도 농촌계몽과 ‘흙의 문화선양’에 앞장섰던 지식인들이 있었다.

3·1 운동 때 33인중 한 사람, 이종일(언론인)은 날카로운 필치로 앞장섰고 소설로 농민을 일깨운 작가도 있었다. 이광수의 ‘흙’, 심훈의 ‘상록수’는 계몽은 물론 항일정신을 일깨우는 그런 작품이었다. 소설 ‘흙’의 주인공 허숭은 변호사요, 그 부인 ‘정선’은 전문학교를 나온 신여성인데도 서울을 등지고 낙향을 한다. ‘상록수’의 남녀 주인공 역시 농촌에 묻혀 ‘야학’을 여는 등 계몽에 힘썼고 윤봉길의사도 상해로 건너가기 전에는 농촌계몽에 진력했다.

이무영은 ‘山家’ 등 일련의 작품을 통해 농촌에 깊이 파고들었고 박영준의 ‘목화씨 뿌릴 때
’, ‘모범경작생’도 빼놓을 수 없는 소설이다. 또 김유정의 ‘금을 따는 콩밭’, 박경리의 ‘土地’와 조정래의 ‘아리랑’ 역시 그 기조는 흙에 묻고 있다. 이렇듯 작가, 지각 있는 지성들이 흙에 눈을 돌렸다.





이제는 양보다 질을

우리의 벼농사를 논하려면 내키지 않아도 일본을 배제하고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구한말까지 우리 농촌엔 측량 기술이 없어 면적 단위, 지번과 농지, 산야의 경계가 부정확했다. 마지기[斗落], 섬[石]이라는 어버트(abut)개념으로 일관했다. 요즘 한 마지기는 200평, 1ha는 3025평이지만 그 때는 눈가늠(목칙)과 ‘대충’이 통하던 시대상을 말한다. 일제가 들어오면서 지적도를 비롯 측량에 의해 논, 밭, 산야, 하천 등의 면적이 정해졌다. 그것은 약탈을 위한 것이었지만 벼 씨 개량, 단위생산량 제고 등 새로운 영농법을 보급한 것은 사실이다. 청진에 비료 공장을 세워 쌀 생산을 독려했고 신품종 개발과 병충해방제 등을 들고 나왔다.

그 무렵 일제가 개발한 벼 품종으로는 깅보즈[銀坊主]와 타마니시키[多馬錦] 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심는 방법도 산식(散植)에서 정조식(正條植), 못 줄을 대는 ‘줄모’를 강요했다. 해방을 맞아 우리 농가에선 풍옥(豊玉) 등의 신품종으로 소득을 높여 오다 오늘에 와선 ‘오대’, ‘동진1호’, ‘남천벼’ 등을 심어 쌀의 질과 다수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좇고 있다.

쌀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한국과 일본에서 선호하는 ‘끈기 있는 쌀’이고 동남아 등지에서 즐겨 먹는 ‘풀기 없는 쌀’이 그것에 해당한다. 풀기 없는 쌀은 밥을 지어도 ‘훅’하고 불면 밥 티가 사방으로 날아가는 그런 종류다. 우리는 그것을 안남미(安南米)라 불렀다. 70년대까지 양 쪽에 무게를 둬 오다 오늘에 와서는 ‘질의 경쟁’ 쪽으로 중심을 옮겼다. 97년 농림업 주요 통계자료에 따르면 생산고에 있어 ‘1ha(3025평)’당 한국은 6.6t(99년 기준), 일본 6.4t, 중국 6.3t이라지만 쌀의 질을 따지는 작금의 정서 앞에 양산의 의미는 반감되어 있다.



곡창지대의 풍속도

2차 대전 후 쌀을 주식으로 삼는 한국, 일본, 대만은 거의 동시에 ‘토지개혁’을 단행한 바 있는데 유독 한국만 실패했다는 평을 들어왔다. 일본과 대만에선 지주들의 몫(유가증권)을 타 산업에 전환, 지주의 몰락을 막은데 반해 한국은 제대로 대처를 못해 지주는 몰락하고 농민 또한 영세농으로 전락했다는 뜻이다. 농경사를 되돌아보면 입에 담고 싶지 않을 만큼 아픔과 한(恨)이 서려 있는 게 사실이다.

일부 토호들의 횡포, 일제의 악랄한 수탈, 농민은 그래서 늘 피동(被動)이요, 인종(忍從)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뼈아픈 역사성을 갖고 있다. 지난날엔 ‘쌀은 곧 금’이요, 부의 상징으로 신분 계량(?)의 척도였다. 소작인들은 그 시절 몇 마지기 땅을 부쳐 먹기 위해 땅주인 앞에 굽실거려야 했고 그러다보니 지주의 하수(사음) 횡포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먹고 살기 어려우면 남의 집 ‘머슴’으로 팔려 가는데 1년 새경(부수)이라는 게 고작 쌀 두가마였다. 하루 품삯은 20전.(일제말 기준)

사음은 벼를 벨 때 논두렁에 앉아 볏단을 속이지는 않는가, 타작마당에선 다시 볏단을 확인하며 탈곡기를 거쳐 나가는 볏단에 이삭은 섞이지 않았는가를 점검한다. 그래서 사음은 상전이었다. 바심을 하는 날이나 명절 때면 사음에게 온갖 토산품, ‘고양이 눈깔’이라는 맑은 술을 진상했다. 초봄 절양 농가에선 메밀가루에 아카시아 꽃을 버무려 쪄먹거나 산나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일제시대 호남평야의 한 아낙네가 쌀 창고 청소부로 일하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쌀 내끼[粒]를 주워 호주머니에 숨겼다가 감독한테 들켜 곤혹을 치르는 장면이 나온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는 ‘픽션’이 아니라 우리 농경사에 각인된 우리들의 초상(肖像)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우리 농촌에도 때로 낭만(浪漫)과 목가적(牧歌的)인 단면도 있었다. 지난날 합덕 평야 같은 곡창지대에선 수 백석, 수 천석 단위의 벼농사를 짓는 부농이 적지 않았다. 이들 부농은 쌀을 집안에 쌓아놓기 어려워 마을 창고나 정미소에 맡겨 놓고 돈이 필요할 때 쪽지에 도장을 찍어주면 그것이 곧 결제(?)였다. 겨울 내내 노름을 하거나 술집에서 밤을 새우고 나서 출고증에 도장만 찍으면 그것으로 변재는 끝난다. 쌀 고장 ‘풍속도’는 이렇듯 다양하며 낭만적인 구석마저 있었다.



이제 한숨을 접자

농촌이 안고 있는 문제점으로는 외미와의 전쟁, 농촌부채의 탕감, 쌀의 국내소비, 식생활개선, 쌀값조정, 농협의 금리인하, 이루다 열거할 수없이 많다. 쌀을 양산해 놓고도 못사는 오늘의 농촌실태는 ‘아이러니’라 치부하기엔 너무나 심각하다. 오죽했으면 땀 흘려 지은 볏 가마를 불태우고 자살 길을 택하겠는가. 낙농도 벼농사와 마찬가지로 이대론 안 된다고 한숨짓는다.

일본은 70년대에 이미 ‘이중 곡가제’를 시행. 생산과잉의 제어수단으로 벼농사를 격년제로 돈을 주고 돌아가며 휴작(休作)을 시키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또 그들은 묵은 쌀을 ‘수중저장’, 질 저하를 막고 있었다. 일본, 교토 근교의 큰 호수 비아코(琵琶湖)의 수중보관이 그 예다. 낙농에도 문제가 많다. 돼지, 소, 닭 등 축산에서 누군가 재미를 봤다하면 너도나도 뛰어들어 생산과잉으로 공멸(共滅)하는 모양새를 흔히 지켜 본 우리들이다.

요즘 농민의 가슴앓이를 하는 쌀 문제 역시 탈출구를 찾아야 한다. 우선 국민들이 솔선해서 농가를 돕는 쪽으로 갈 때 주름은 펴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피자 등 외국식품을 되도록 줄이고 떡, 쌀국수, 과자, 술 등에 폭넓게 전용했으면 싶다. 그렇게 해서 우리 농민들이 다시는 통곡을 하거나 만가(輓歌)를 부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서둘러 녹색의 꿈을 재현, 가고 싶은 고향, 정이 넘치는 넉넉한 농촌을 염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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