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시평] “새해엔…, 겸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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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시평] “새해엔…, 겸손하십시오”

  • 승인 2006-01-18 00:00
  • 안순택 논설위원안순택 논설위원
▲안순택 논설위원
▲안순택 논설위원
산에 올랐다, 새해 아침. 묵은 해의 것들을 털어내고 새 공기를 한껏 들이켜 채우고 싶었다. 참으로 시끄러운 세상이다. 웬 거짓말은 그리도 많은지, 욕심은 그리도 많은지, 해코지는 또 그리 많은지. 조용히 살려는 서민들 가슴엔 큰 구멍들이 숭숭 뚫렸다. 체감온도 영하 20도, 좋다! 시원하다.

산사에 들러 약숫물을 뜨는데 스님 한 분이 차 한 잔하자며 방에 들길 청했다. 솔잎향 진한 차를 나눠 마시며 스님이 건넨 덕담은 나 혼자 듣기엔 과분한 것이었다.

스님의 덕담은 맹사성(孟思誠) 이야기로 시작됐다. 훗날 명재상이 되었지만, 맹사성도 스무살 시절엔 건방을 부리던 패기만만한 청춘이었다. 그도 절집에서 차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찻물이 잔의 시울을 넘어 흘러내리는데도 모르는 체 자꾸 따르는 거였다.

“스님, 넘칩니다. 방바닥을 버리겠어요.”
사성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스님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걸 아시는 분이, 오만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건 어찌 모르십니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사성은 부끄러움에 앉아있기가 민망했다. 벌떡 일어나 나가려다가 문턱에 머리를 찧고 말았다. 스님이 껄껄 웃으며 한 마디 더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습니다.”
겸손을, 불가(佛家)에서는 다른 말로 ‘하심’(下心)이라고 한다. 마음을 낮추라는 말이다. 낮추고 낮춰, ‘우·묵·눌’(愚·默·訥)하라고 가르친다. 바보처럼 살고, 침묵하며, 꼭 말해야 할 땐 조심조심하라는 것이다.

‘우·묵·눌’까지야 어렵다 하더라도 마음을 조금 낮추면 세상의 시끄러움은 덜 것이다 싶다. 보수의 겸손, 진보의 겸손, 기성 세대의 겸손, 젊은 세대의 겸손, 좀 더 많이 배운 사람의 겸손, 못 배운 사람의 겸손, 가진 자들의 겸손, 갖지 못한 자들의 겸손. 남 핑계 댈 게 아니라 스스로 고개를 숙이면 부딪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겸손도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마음은 낮추되 몸을 낮추라곤 않았으니, 이는 필경 굽히되 비굴(卑屈)하지 말라는 뜻일 것이며, 겸손도 때로 당당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내 확신도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하는 건 무소신도 비굴도 아니다. 역설적으로 겸손도 용기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스님의 덕담은 계속된다. 한 선사가 있었는데, 제자나 신도들이 찾아와 절하면 맞절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신수가 훤하십니다. 그렇지만 겸손하십시오” “입고 계신 옷이 참 잘 어울리십니다. 하지만 겸손하십시오.”
심지어는 부처님 관세음보살을 향해서도 겸손을 말했다.

“크게 깨달으셨으니 즐거우시겠습니다. 하지만 겸손하십시오.”
이 좋은 덕담을 어찌 혼자 탐하랴. 나랏님, 백성을 위해 정치를 한다는 분들에게도 전하고 싶다.
“대통령님, 항상 말을 잘하시니 좋으시겠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장관 임명하시느라 힘자랑을 하셨으니 뻐근하시죠? 겸손하십시오.”

“여당 의원님들, 한나라당 의원들을 내쫓아 버렸으니 깨소금 맛이었겠습니다. 그렇지만 겸손하십시오.”
“한나라당 의원님들, 추운 날씨에 장외투쟁하시느라 고생 많으시지요. 사학법 말고, 추위에 떨고 있는 민생도 보셨습니까? 겸손하십시오.”

그리하여, 올 한해 마음을 낮추는 정치로 백성의 속을 썩이는 일이 더는 없었으면 좋겠다. 겸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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