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한 혹은 현란한 말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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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한 혹은 현란한 말 잔치

  • 승인 2006-01-13 00:00
  • 최충식 논설위원최충식 논설위원
"밥은 먹었는데 식사는 하지 않았다."
"때리기는 했지만 폭행은 하지 않았다."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이어지는 특별한 달력에 따라 연구를 했다는 황우석 교수. 그와 관련해서도 많은 유행어와 패러디가 양산되기도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인위적인 실수'라는 말. 내가 시켜서 한 짓이라고 말하기는 싫고, 누군가가 알아서 나 몰래 한 짓이라고 말하기엔 양심이 찔릴 때 사용하는 중도적 표현.

'원천 기술' 또는 '원천적 기술'. 지금 당장은 실현할 수 없지만 초능력에 가까운 의지로 엄청난 이익을 실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지 않을 수 없는, 매우 불가사의한 기술 능력이 있음을 빗댄 말. 말이 좀 복잡해진다.
말이 잡다해질수록 은폐와 술수와 아닌, 정말 살가운 말들이 그리워진다.

말의 유래를 알고부터 '부랴부랴'란 말을 들으면 어디서 연기가 치솟고 119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불이야! 불이야!'가 그 원형이기 때문이다. 불이 났다고 '불이야' 하고 외치며 내달리듯 화급한 상황에서 서두를 때 쓰는 말이었다. 지금도 물론 쓰고 있다.

무슨 일이 불만스럽거나 하면 입버릇처럼 '넨장맞을'이라고 구시렁거린다. 네 난장(亂杖)을 맞을, 이런 뜻이다. 난장은 장형(杖刑)에서 인정사정 가리지 않고 마구 치는 형벌을 말한다. '제기 난장을 맞을'이 변한 '젠장맞을'도 이와 같이 풀면 된다.

부부간에 다정스레 주고받는 '여보'도 무척 거리감이 느껴지는 표현이다. 서먹서먹한 사이끼리 쓰는 '여기 보시오'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부부를 왜 낯선 사람처럼 불렀을까? 함께 길을 가면서도 짐짓 헛기침하며 저만치 떨어져 성큼성큼 걷던 체면의식 때문이었을까? '여보'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깝지 않은 듯 완충하는, 또는 위장하는 말이다. 어법 같은 걸 따지지 않는다면 부부나 애인 사이에 쓰는 '자기'라는 말처럼 촌수가 가까운 말은 없을 성싶다.

말이 또 복잡해지기 전에 장사치들의 경우로 넘어가자. 자기들만의 독특한 억양과 발음을 써서 존재를 알리는 데는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다.

어느 날 밤이었다. 출출하던 차에 "찹싸알 떠억∼" 하고 골목을 총총히 사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하도 오랜만에 맛보는 정취구나 싶어 달려나갔다. 찹쌀떡을 달라 했더니 다 팔렸고 메밀묵만 있다지 않은가. 있지도 않은 찹쌀떡은 왜 들먹이느냐니까 대답이 걸작이다. '그냥' 그렇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찹쌀떡 장수를 '그냥' 보낸 적이 있다.

요즘도 재래시장이나 썰매장 같은 데를 가면 컵라면과 함께 번데기를 파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여하튼 가끔 번데기장수를 만나면 "뻔∼" 하고 길게 늘어뜨려 놓고서 저만큼 가서 "데기!"라고 짧게 스타카토로 덧붙이는 그 목소리가 잔영처럼 남아 있음을 느낀다.

'고오물 삽니다아∼'
끝을 여운 있게 마무리하는 고물장수의 골목 그득한 남저음(男底音)도 들어본 지 오래다. '아이스께끼' 장수의 외침도 유년의 나른함을 씻어준 복음(福音)이었는데 이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엿 사시오. 엿 사. 새 큰애기 젖가슴보다 달콤함 울릉도 호박엿.'

엿장수 맘대로 흰 고무신짝처럼 짹짹거리는 가위소리에 한낮은 길었다.
'싸구려'라면 질이 낮고 값싼 물건을 일컫는데 원래는 물건이 싸다며 '싸구려', '아주 싸구려' 외치던 소리였다. 옛 어른들 말씀이 머리빗 장수 근방에서 장사하는게 아니라고 한다. 무슨 물건이든 팔려고만 하면 옆에서 "비싸요(←빗사요)" 한다는 것이다.

신을 깁는 사람을 '신기료장수'라 하는데, 여기에도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신을 깁겠느냐는 뜻에서 '신 기리오?' 하고 떠다니는 데서 얻은 이름인 것이다. 눈을 씻고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맷돌 쪼는 '매죄료장수'는 맷돌을 쪼갰느냐며 '매 쪼리오?' 하고 다녔을 터이다.

모두가 떠돌아다니며 사는 돌팔이 인생들. '돌다'와 '팔다'의 뜻이 다 들어 있는 돌팔이는 돌아다니며 물건이나 기술을 파는 사람이다. 돌팔이 무당이 있었고 돌팔이 장님이 있었는가 하면 글보다 돈에 관심 있는 돌팔이 글방이 있었다. 돌팔이 의사처럼 무면허나 가짜로 뜻이 변한 경우도 있다.

말이 또 복잡해지지 않을지 모르니 한 가지만 더 쓰고 끝내야겠다. 이제 보니 '시킴을 당하다'는 말도 유행어 반열에 들 것 같다. '시키다'라고 쓰면 될 것을, 괜히 비장하면서도 불가피하고 또 뭔가 있는 것처럼 꾸밀 때 사용하는 군더더기 표현이란다. 난자 채취 동의서를 읽어줬을 뿐이라는 사람, 6개월만 기다려달라는 사람. 시킴을 당해서 바꿔치기하고 시킴을 당해서 조작을 했을까? 윗사람의 시킴을 당해서? 자신의 시킴을 당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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