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 등 한류열풍 형성…종합예술 거듭 양질 영화제작. 국민정서 함양 이바지 기대
우리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열도를 뒤흔들더니 이어 ‘대장금’ 등도 뒤질세라 홍콩, 말레이시아(동남아)에 진출, ‘코리아웨이브’를 형성하고 있다. 중국대륙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드라마나 영화란 엄청난 잠재력을 갖
필름은 지금처럼 1~2시간짜리가 아니라 각기 다른 내용(테마)의 1, 2분짜리였다. 하지만 움직이는 사진 앞에 모두 놀랐고 기차가 달리는 신에 비명을 지르는 소동까지 벌였다고 한다. 당시는 모든 관객이 스크린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천체 망원경을 들여다보듯 좁은 구멍으로 한 사람씩 번갈아 구경하는 원시적 수준이었다. 그래서 영화란 과학적 발명품, 새로운 미디어로 간주하는 통에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했다.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은 건 20세기에 접어들면서였다.
그러니까 ① 렌즈 ② 기계전기 ③ 화학물 등의 기능과 인간욕구에 의해 촬영기와 셀룰로이드 필름을 합치면서 제구실을 하게 된다. 이후 선진국들은 경쟁 끝에 오늘과 같은 영화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영화하면 미국이 선두요, 프랑스, 이태리, 영국 등이 그 뒤를 좇고 있다. 한국영화는 서양이 아닌 일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게 사실이다. 종교(기독교)를 제외한 현대문물 전반이 일본을
일본영화의 태동
일본은 1897년에 첫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들은 영화를 ‘활동사진’이라 불렀고 무성영화 → 발성영화(토키)를 거쳐 태평양전쟁 때와 전후라는 몇 단계를 거치며 성장을 했다. 우리보다 한 발 앞서 개화한 일본은 그 시대에 이미 순 영화와 일반서민이 선호하는 경향(傾向)적 작품을 만들었다는 건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대표적인 것으론 ‘이 어머니를 보라!’, ‘도회교향악’을 꼽는다.
하지만 1929년 미국에서 발성영화를 수입하면서 무성영화와 변사(辯士)시대는 막을 내렸다. 태평양전쟁 시는 ‘5인의 척후병’, ‘마레이(馬來)의 하리마오’ 등 전시, 선무공작용 영화를 양산한다. 그들 영화가 해외로 수출되기 시작한 건 전후의 일로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라는 천재(감독)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그의 대표작은 ‘라쇼몽(羅生門)’으로 이 영화는 한 시대 일본열도를 들뜨게 했다. 이어 미소구치(溝口), 사이카쿠(西鶴), 기누가사(衣笠)의 작품들이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일본은 황금기를 맞는다.
우리가 6·25전쟁의 폐허 속에서 허덕일 때 일본은 연간 500편의 영화를 제작하며 관객동원 12억이라는 천문학적 기록을 수립했다. 그러나 70~80년대 TV의 등장과 비디오 등 안방극장이 활개를 치자 사양길에 접어들어 야쿠자스토리, 애니메이션, 포르노 쪽으로 기울기도 했다.
한국 영화의 시조 ‘아리랑’
한국 최초의 영화는 1929년 나운규가 제작한 ‘아리랑’으로 이 작품은 제2의 3·1운동이라 이를 만큼 겨레의 가슴에 민족혼을 심어준 작품이다. 나운규는 타고난 제작자로 80년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다. 이 영화는 시나리오와 감독까지 자신이 맡아 소화, 천재성(거장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뿐만 아니라 전국을 순회 상영, 가는 곳마다 문전성시를 이뤘다.
평양에선 몰려드는 인파에 극장 벽과 대들보가 내려앉는 소동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아리랑’주제가를 부른 가수 이정숙 또한 하루아침에 ‘스타덤’에 올랐다. 그것은 동반(同伴)성공을 의미한다. 나운규는 어려서 선친(나형권)의 항일투쟁을 지켜보며 자란 탓에 아리랑 같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의 평생 동지로는 윤봉춘이 있다. 이 두 사람은 같은 함북 회령(會寧)출신으로 간도 명정중학과 훗날 연희전문도 같이 다녔다. 윤봉춘의 부친 ‘득주’는 전봉준, 동학혁명에 가담했던 인물이고 나운규의 부친은 구한말 조선군 장교출신 항일투사였다.
두 사람은 이렇듯 환경이 비슷한 탓에 더욱 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연희전문 재학 중 북간도시절의 항일 경력이 드러나 퇴학은 물론 재판에서 2년과 1년6개월의 형을 받고 옥살이를 했다. 나운규는 출옥 후 ‘풍운아’를 비롯 ‘벙어리삼룡’, ‘오몽녀’ 등 민족정기를 담은 작품을 내놓았다. 하지만 얼마 후 ‘남편은 경비대로’, ‘금강한’ 등의 일본영화에서 악역을 맡는 등 열화 같던 항일의지가 꺾이며 친일 쪽으로 기울었다. 이에 윤봉춘이 크게 꾸짖었으나 얼마 안가 37세의 나이로 나운규는 세상을 떴다.
조선영화의 개척자는 이렇게 유성(流星)처럼 떨어졌다. 반면 윤봉춘은 끝내 지조를 꺾지 않았으며 해방을 맞아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그가 남긴 작품은 ‘자유만세’, ‘3·1 혁명기’, ‘유관순’, ‘애국자의 아들’, ‘윤봉길의사’, ‘논개’, ‘다정도 병이런가?’, ‘처녀별’, ‘성불사’ 등이다. 우리 영화는 해방 후 온갖 시련을 딛고 국제영화제에서 큰 상을 내리 받는 등 오늘에 와선 ‘한류’ 즉, ‘코리아웨이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대전의 극장 어제와 오늘
영화와 극장. 그것은 바늘과 실, 관계에 다름 아니다. 영화가 들어서며 상설공연장인 극장의 등장은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서울에는 단성사, 우미관, 신부좌 등 여러 극장이 다투어 들어섰고 대전에도 두 개의 극장이 문을 열었다. ‘경심관’과 ‘대전극장’의 개관이 그것이다. 시기는 1930년대 중반, 1932년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한 직후였다.
이미 그 시대 일본엔 도오에이(東映), 쇼치쿠(松竹), 다이에이(大映) 등 영화사가 있었는데 지금도 세계적인 기업으로 군림(?)을 하고 있다. 30년대 말에 와선 그들 특유의 무협물(검객), 이와미(岩見重太郞)와 쌍칼잡이 미야모토(宮本武臟) 등이 상영되었고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국책영화 작품인 전쟁물이 쏟아져 나왔다. ‘육탄3용사’라거나 니시스미(西住) 대위의 전차무용담, 태평양전쟁의 전황 등이 주류를 이뤘다. 물론 흑백영화였다.
‘남쪽에서 부는 바람(대동아공영권)’ 등 선무공작용 필름, 또 당게사젱(외눈에 외팔검객)도 선보였다. 일본천황의 관병식(觀兵式)장면, 백마를 탄 ‘히로히토’천황의 근위병사열 광경을 말한다. 상영 중 황송하옵게도(가시고쿠모) 소리가 나오면 일인 관람객은 부동자세를 취하기도 하고 군인은 벌떡 일어나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그 때 입장료는 10전, 때론 15전을 받았다. 극장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래서 일인과 고위공직도 극장을 자주 찾았다. 태평양전쟁 말기, 야마키(山木文憲) 지사와 마지막 지사 이범익, 그리고 이니가키(稻桓), 부윤(府尹)도 자주 영화를 관람했다. 해방 후엔 외화(주로 미국작품)가 홍수처럼 밀려왔는데 그것은 ‘흑백’ 아닌 ‘컬러’ 영화였다. 6·25 전쟁 이후 70년대까지 극장은 노다지를 캐는 사업으로 인식되어 왔다.
극장 전성기의 ‘풍속도’
그 때의 양화는 이루다 열거할 수없이 많았다. 지금도 눈앞에 어른거리는 명화를 무작위로 열거해보자. ‘벤허’, ‘쿼바디스’, ‘소돔과 고모라’, ‘무기여 잘 있거라!’, ‘25時’, ‘남태평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로마의 휴일’, ‘黑船’, ‘초원의 빛’, ‘콰이강의 다리’ 등 헤아리기 힘들다.
60년대 문화부를 맡고 있을 때 영화평을 쓴다고 지면을 어지럽혔던 일이 생각난다. 세상모르고 덜렁거릴 때의 일로 지금 생각하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솟는다. 우리 영화로는 ‘성춘향’, ‘마부’,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만추’, ‘오발탄’, ‘자유부인’, ‘순애보’, ‘이순신’ ‘산유화’, ‘찔레꽃’ 등 수많은 작품이 있었다. 그 무렵 대전엔 ‘중앙’, ‘대전’, ‘신도’, ‘아카데미’, ‘성보’, ‘중도’, ‘동화’, ‘고려’ 극장 등이 호황을 누렸다.
신변잡담 하나만 더 늘어놓자.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왔다. 그는 이름난 험구로 정치지망생이기도 했다. 만나면 신문기자란 ‘개평꾼’이라느니 ‘괴테’가 말한 ‘파리’ 논에서부터 제 앞도 못 여미는 주제에 ‘알권리’ 운운하며 쭐렁댄다고 야유하는 그런 친구였다. 그에 맞서 언론의 기능이나 사명을 설파(?)할 재간이 없어 궁리 끝에 극장에 안내를 했다.
‘로마의 휴일’이라는 명화가 상영될 때 이야기다. 앤 공주(오드리 헵번)와 미국기자(로마특파원, 그레고리 팩)의 열연장면이 볼만했다. 틀에 박힌 생활(영국황실)에 싫증난 앤 공주가 로마순방 중 밤중에 호텔을 탈출, 온갖 기행(奇行)을 저지르고 다니는 영화. 때 묻지 않은 앤 공주는 우연히 만난 신문기자와 어울려 시내를 돌아치며 갖가지 소동을 벌인다. 앤 공주는 끝내 기자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고 기자 역시 특종으로 찍었던 공주의 흐트러진 사진을 신문에 게재 않기로 작심, 고별회견 때 돌려주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라스트신’이 인상적이다. 앤 공주는 기자들과 악수하고 돌아서며 그레고리 펙을 향해 눈물을 글썽인다. 하지만 이 눈물엔 또 다른 곡절이 있었다는 후일담이다. 첫 출연 작품 ‘로마의 휴일’. 고별기자 회견장면 촬영 때 감독한테 호되게 꾸지람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는 속사정이 있다. 이것이 영화다. 이 작품을 보고난 험구(친구)는 “자네도 저럴 수 있는가? 신문기자란 역시 건달 직업이야!”라고 뱉듯이 말했다.
영화는 현대인의 伴侶
영화란 무엇인가? 흔히 접하는 질문이다. 그것은 단순한 오락물이 아니라 생활인의 양식이며 반려(伴侶)라 해서 틀릴 게 없다. 그래서 ‘종합예술’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대본(문학)과 노래(음악), 의상(분장), 장치(미술), 춤사위(무용), 거기에 배우까지 동원된다. 영화는 그래서 감미롭다. 지식과 정서, 인본(人本)의 올로 짜내는 비단과 같은 것이 되어 관객에겐 감동은 물론 경제적 이익까지 가져다준다.
예를 들면 대하물(大河物)은 2~3주 동안 밤을 새워 읽어야 하지만 영화에선 한두 시간이면 거뜬하게 해낸다. 돋보기를 밀어 올리며 장편을 독파한다는 건 고역이다. 하지만 영화와 TV에선 편안한 자세로 감미롭게 관람할 수가 있다. 그러니 시간까지 절약된다. 그렇다고 영화에 있어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극장에 자주 드나들다 보면 자연 독서와 멀어진다. 그리고 요즘 영화는 옛날 것처럼 중후한 맛이 없고 액션물, 과학, 공상세계, 심하게는 ‘포르노’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고 노장층에선 불만이다.
한국영화 80년….수많은 작품, 명감독, 명배우를 배출하며 오늘날엔 ‘코리아웨이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영화는 국력이라는 말처럼 양질의 영화를 제작, 국민정서 함양에 더욱 기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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