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진의충청비사] 느림의 미학으로 60년 화합정치 중심에

[안영진의충청비사] 느림의 미학으로 60년 화합정치 중심에

36. 충청인의 기질

  • 승인 2005-12-29 00:00
  • 前 중도일보 주필前 중도일보 주필
각 지역의 장점 수용 ‘행정도시 시대’ 주역으로
멍청도. 방관자 등 정치판서 빚어낸 오명 벗어야




전회에 이어 충청인 기질을 되짚어 본다. 줄곧 ‘양반’, ‘청풍명월’로 불러오다 갑자기 ‘박수부대’, ‘방관자’, ‘느림보’
라 하더니 ‘무정란(無精卵)’ 이라 야유한 때가 있었다. 우리는 ‘무정란’이란 말에 구토증을 일으킨다. 지난 이야기지만 이와 같은 별명이 왜 나돌았는가? 또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를 추적해 본다. 이는 과거 청색바람, 황색바람 진영에서 지어낸 악의에 찬 비아냥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그들 전략에 따르지 않는다 해서 악의에 찬 선거용 작명(?)이라 할 수 있다.

충청인은 매사에 편협하지 않으며 중용과 균형감각을 지닌 그런 역사와 전통을 지녀왔다. 그 체질은 자글자글 끓는 냄비가 아니라 무게 있는 가마솥처럼 중심을 잃지 않았음을 충청인은 늘 자랑으로 삼아왔다. 일각에서 느리다고 하지만 신중하다는 건 단점이 아니라 되레 장점일 수 있다. 때로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해서 답답하다고 한다. 그러나 부화뇌동을 하거나 패거리를 짓는 것만이 장점은 아닐 것이다.

지금은 영호남의 골이 좁혀져 있지만 그만큼 모두가 노력한 결과라 하겠다. 예를 들면 88횡단(영호남)도로건설과 지자체 간의 자매결연, 광주의거기념탑에 상대편 수뇌부가 참배를 하는 등 분위기가 현저하게 달라져 있다. 또 그만큼 세월이 흐른 탓이다. 이제는 남북화해라는 민족적 과제 앞에 영호남 갈등은 옛 이야기로 묻혀가고 있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피
해의식에 젖어 있던 호남에서도 대통령을 배출, 한(限)을 푼데도 원인이 있다.



영호남 기질 이야기



엄밀한 의미에서 영호남의 지역감정은 5·16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박대통령과 DJ의 대결로 이어지며 호남이 DJ 텃밭이라 해서 반사적으로 푸대접을 받은데 있다. 5·18 광주사태는 그 연장선에서 돌출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암울했던 그 시대 호남사람들의 언동에 대한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그 당시 정황을 설명하자면 끝이 없다. 그러니 본란에선 ‘가십’을 다루는 수준에서 시민의 눈에 비쳤던 작은 사례를 들어본다.

대선 때 “우리가 남이가?”라며 영남이 똘똘 뭉치자 “이건 아니다”라며 영남에 맞섰던 호남인들…. 양측은 엄청난 응집력과 감정으로 대결을 벌였다. 그것은 가공할 충돌이며 ‘건곤일척’의 대회전(大會戰)이었다. 여러 차례의 충돌이 있었다. 박대통령은 ‘조국근대화’를 신앙(信仰)처럼 내세우며 경제개발을 외치자 호남에선 군사정권의 부도덕성과 ‘장기집권타도’를 외치며 맞붙었던 싸움이었다.

영남의 그 아성에 호남에선 육탄으로 맞섰다. 영남의 대권후보는 유세 중 돌팔 매 세례에 유혈극을 빚기도 했다. 유신 하에서 있었던 일이다. 중앙공무원 교육원에 특강 차 나갔다가 경험한 일이다. 10분 휴식 시간에 한 수강생(부이사관)이 나와 한 말이 지금도 귓전을 때린다. “저는 광주에서 새벽부터 2차선 도로를 달려온 부이사관 XXX입니다.” ‘2차선 도로’란 호남푸대접을 말하는 것이다.

고급 공무원마저 이렇듯 볼멘소리를 하는 걸 듣고 누군가는 이에 대해 “충청도 공무원 같으면 감히 그 시대에 그 말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그 다음은 5공 초기 광주사태 직후의 일로 언론간부 회의에서 호남출신이 영남출신과는 식사 때 마주 앉기를 꺼리는 이가 있었다. “저 XX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라며 자리를 옮겨 앉는 걸 봤다. 광주사태 직후의 분위기는 그러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그 다음은
5공 초기 계엄 하에 유성호텔이 화재를 만나 이를 수리하고 신장개업을 한다는 초청을 받은 일이 있다. 나가 보니 장성이 4~5명 그리고 일급 기관장, 정보관서의 장, 합해 10명 선이었다. 옆에는 탤런트, 광고모델이 붙어 앉아 시중을 들고 있는데 이때 바로 옆자리 아가씨에게 농을 걸었다.

조금은 호남 ‘악센트’가 섞여 있는 것 같아 “김대중 선생 동네에서 왔구먼?” 했더니 “네에, 저희들은 죽으나 사나 김대중 선생님이죠.” 그 때 장성들 눈초리가 그녀에게 쏠렸다. 당시 DJ는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을 때였다. 그 후 이 말을 전해들은 어느 인사는 이런 말을 했다. “그렇다니까 그 사람들은 유태인처럼 뭉친다니까”였다. 충청도 아가씨 같으면 백만 원 뭉칫돈을 주고 한마디 하란다면 이 고장 정치인 선전을 하겠느냐며….

한 예만 더 들어보자. 김해 공항에서 부산역으로 달리는 택시 기사의 말이다. “우리 부산 사람은 호남사람을 못 당합니더!” 그 운전기사는 부산 토박이로 남의 집 아래채에 세 들어 산다는 것이다. 새벽에 집을 나서려는데 안 채에서 주인부부가 악을 쓰며 싸우더라고 했다. 발을 멈추고 듣자 하니 선거이야기였다. 주인남자는 호남출신이고 부인은 부산인데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나더라는 것이다.

남자는 DJ를 찍어야 한다는 것이고 안주인은 YS도 야당이니 그를 찍겠다고 하자 재떨이가 날아간 모양이라고 했다. 운전기사가 만약 광주에 가 산다면 터놓고 YS를 찍으라며 그 소동은 못 부릴 거라며 “몬 당합니더. 우린 그 사람들을” 그렇게 나오는 것이었다. 작은 사례요, 그냥 흘려버릴 이야기지만 충청도 기질론을 꺼내다 보니 이쯤 되어 버렸다.



충청권은 ‘가로막’역



충청인(중부권)을 향해 멋대로 야유를 하거나 폄하발언을 하는 건 옳지 않다. ‘멍청도’, ‘느림보’, ‘박수부대’, ‘방관자’, ‘임종형(臨終型)’, 심지어 무정란(無精卵)이라고 까지 했다. 이와 같은 별명은 옛날엔 없었던 것으로 정치판에서 지어낸 일고의 가치도 없는 그런 작희라 하겠다. 그러니 근거도 실체도 없는 별명일 뿐이다.

선거결과가 만족지 않을 때면 중부권 때문이라는 ‘분풀이용’ 비아냥에 불과했다. 되돌아보면 60년 정치사에 중부권은 몰표를 던진 일이 없었다. 민주적 선거풍토에서 98% 또는 95% 득표가 과연 미덕인가?

여·야 관계는 45대55 비율이 이상적이라는 말이 있다. 98%선의 승리는 그런 의미에서 문제점을 드러낸다. 어느 지방이 98%, 95%를 던졌다면 이는 획일을 위한 패거리 정치의 표본으로 점령을 위한 전투행위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다. 우리 중부권, 충청인은 역대 대선에서 그 어느 후보에게도 80% 이상 표를 몰아 준 일이 없다. 이 고장 출신 윤보선과 김종필 두 지도자에겐 매우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에 몰표를 안 줬다 해서 ‘무정란’이니 ‘방관자’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박정희-윤보선 대결 때는 윤보선이 얼마간 앞섰던 걸로 짐작이 가고 박정희-김대중 결전 때는 김대중 표가 조금 앞섰을 뿐 몰표를 주지 않았다. 청색바람, 황색바람 앞에서도 충청인은 균형감각을 잃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로터리’ 구실을 해냈고 동남풍(영남)이 사라호처럼 북상을 할 때나 서남풍(황색)이 불어 닥쳐도 도에 넘친 광란은 없었다.

그래서 광풍이 중부권에 와선 한 숨 돌리게 했다. 직선북상하다가도 얼마간 우회하는 ‘로터리’역을 다 했다. 결과 ‘캐스팅보트’역을 한 일이 있으며 노맨스랜드(No-mans-land) 구실을 해온 과거를 갖고 있다. 일방통행과 무슨 바람(광풍)도 이렇듯 잠재우며 또 그것을 거르고 식히는 청량제 구실을 해왔다는 생각이다. 또 다른 표현을 빌리면 충청권은 정치에서 ‘캐스팅보트’ 말고도 가로막(橫隔膜) 역할을 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가로막이란 해부학, 또는 윤리학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인간 신체의 복부엔 가로막이라는 게 있다. 이 가로막은 인간을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로 나누는 얇은 막으로 되어 있다. 통념상 형이상은 복부의 상부를 뜻하며 이 부분은 뛰는 가슴(정열)과 선악을 식별하는 두뇌가 있다.

반면 형이하는 인간의 본능(탐욕)이라든가 배설 기능을 맡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가로막은 탐욕이 지나치지 않도록 견제하고 또 다른 측면에선 도에 넘친 이성(理智)에 기울지 않도록 조종하고 견제하는 게 가로막의 역할이다. 우리 중부권이 이렇듯 늘 가로막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면 누가 감히 ‘박수부대’, 방관자’라 할 것인가.



중부권의 역할

속된 표현으로 정치란 ‘조화’라는 말이 있다. 한 쪽이 승리하면 한 쪽은 멸망하는 전투행위가 아니라고 한다면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극한 대결은 있을 수 없다. 여야관계만 해도 그렇다. 서로 이견을 드러내다가도 타협점을 찾아 조율하는 궁극적으로는 합의집행(合意執行)으로 이어가는 게 여야의 정치형태다.

그렇다면 선거란 ‘상대방의 타도’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게 평범한 이치다. 또 중세 때처럼 군주 한 사람에게 신명을 바치고 온갖 권한을 한 사람이 거머쥐는 세상도 아니다. 지역정서라는 것도 그렇다. 내 고향, 이웃, 동문, 종친 등에 향의를 갖는 건 아름다운 일이다. 또 그것은 미덕일 수 있다. 하지만 꼭 내 고향출신만을 고집하며 타 지방 인물을 모략중상하는 그런 풍토여선 안 된다.

이젠 모두가 한 번쯤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묵은 때를 훨훨 털어내야 할 때다. 우리 충청인들은 중부권 역할이 무엇인가를 놓고 새로운 몸가짐을 지녀야 할 시점에 와 있다. 행정도시가 새로이 들어서면 우리의 역할은 더욱 무거워질 것이다. 행정본산으로서의 입지,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로서의 기능, 국토의 중심, 과학도시의 위상, 전통적으로 이어온 우리의 자화상 등 눈을 미래로 돌려야 할 시점이다.

“우리가 남이가?”라거나 ‘오로지 내 고향 지도자만이’라는 이젠 빛바랜 그 몸짓에서 서둘러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이젠 누구를 탓하고 상대를 폄하하거나 상처내기 등 작태는 서둘러 버려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 중부권 충청인부터 거듭나야 한다. 우리의 전통, 체질과 토양이 그러했듯이 남의 이야기는 되도록 줄이는 게 좋다.

수도권 시민들의 세련된 모습과 간결한 언동, 영남의 강직성과 진취적인 기개, 호남의 사교적 성격과 예술문화의 화려한 전통, 이와 같은 장점을 수용하고 남의 약점은 되도록 감싸주는 그런 도량, 선비로서의 품위를 드러냈으면 한다. 연방으로 구성된 미국, 혼성국가인 스위스는 세금을 징수하는데도 통역을 앞세우는 나라인데도 화합정치를 이루는 판에 항차 단일민족인 우리가 반목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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