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민망해진 나는 옛일(?)을 주섬주섬 되새겼더니 그제야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나를 반겼다. 나는 K선생의 여고 동창생들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면서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정치 지망생 얘기를 꺼냈다. 그가 학위를 받을 때 내가 축하를 보냈고 내가 상을 받았을 땐 그가 축하하기도 했다. 인사치레일 수도 있겠지만 내 글의 애독자라고까지 했다.
하여간 나는 자치단체장을 거쳐 정치로 입문하려는 그에게 명함을 몇 번이나 내밀었는지 모른다. 나는 그것을 그의 낙선 이유 중 하나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좌중은 이내 웃음꽃이 피었다. 출세하려거든 남의 이름 잘 기억하고, 악수 잘해야 한다는 데 모두 공감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 그렇다. 오래 전에 한 번밖에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 이름을 잊지 않고 부르며 악수를 청해 온다. 아마도 그러면 상대편에 대하여 이내 호감을 갖게 될 것이고, 최소한 성만이라도 기억한다면 인간관계에서도 유리할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강철왕이라 부르는 카네기의 얘기다. 그가 소년 시절에 토끼를 한 마리 잡았다. 암컷인 그 토끼는 왕성하게 번식, 오래잖아 토끼집이 가득 찰 정도로 새끼가 불어났다. 그런데 먹이가 모자라니 큰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곧 동네 아이들을 불러모았던 것. 카네기는 토끼가 먹을 수 있는 먹이를 많이 가져오는 아이의 이름을 새끼토끼에 붙여 주겠다고 했다. 동네 조무래기들은 앞다투어 뿔뿔이 흩어져 토끼 먹이를 찾으러 나섰음은 물론이다.
그는 어릴 때의 이 경험을 평생 잊지 않았다. 바로 이 인간심리를 이용해서 후일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통솔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 옛말에 망신당하려면 아버지 함자도 생각나지 않는다 했다. 에디슨 같은 발명왕도 관공서에 일보러 가서 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다시 집에 와서야 기억해 냈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남의 이름을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해서는 인체를 셋으로 나눠 기억하면 좋다. 석자 중 한 글자라도 머릿속에 담고 있으면 나중에 재생하기 훨씬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각자 나름대로 머리-성씨, 몸통-이름 가운데 글자, 하체-끝 글자 등으로 신체 특징과 고리를 지어놓는다(이 경우, 상대에게 결례가 되지 않도록 은밀하게 이 작업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
예전에 건망증이 아주 심한 사람이 살았었다. 얼마나 심했던지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은 기어다니는 이(蝨)를, 박씨는 지붕 위의 박을 그려놓는 방식으로 표시해 놓아야만 했다. 어느 날, 배씨 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 잊지 않으려고 먹는 배를 하나 사 가지고 왔다. 배(裵)와 배(梨)의 음이 같은 데 착안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오다가 배가 고픈 나머지 그만 그 배를 먹어치웠다. 결국 다 먹어치우고 남은 것은 배 꼭지뿐, 누가 성을 물으니 '꼭지'씨요, 하더란다.
십자군 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영국 청년 길버트 버켓이 사라센 왕국의 포로로 노예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임금의 딸 공주가 그 청년과 사랑에 빠져 버렸다.
임금은 깜짝 놀라 청년을 당장 영국으로 돌려보냈다. 그로부터 공주는 시름시름 앓아 누웠다. 상사병을 앓은 것이다. 견디다 못한 공주는 편지를 남긴 후 몰래 영국으로 도망을 갔다. 공주가 아는 영어라곤 '런던'과 '길버트', 단 두 마디. 천신만고 끝에 런던에 도착했지만 의사소통이 될 리 없었다.
오로지 '길버트'라는 이름만을 외워대며 온 길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사람들은 그녀를 미친 사람이라며 손가락질해대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하루, 길버트의 하인이 우연히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 하인으로 주인에게서 공주와의 러브스토리를 들어서 익히 아는 터라 곧장 자기 주인에게 인도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공주는 꿈에 그리던 길버트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길버트의 아내가 된 이 사라센 공주, 그녀가 바로 영국 켄터베리 대주교를 지낸 토마스 베켓의 어머니다.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이론이 아니라, 이름 석 자를 알아주고 불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당연히, 지금부터라도 남의 이름을 잘 기억해야겠다는 게 오늘의 결론이다. 독자 여러분께도 감히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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