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지나온 시간이 아쉬워서가 아니다. 지금 이 자리가 만족스러운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보들레르의 시구처럼 ‘시간은 우리의 생을 잡아먹기에/ 그 음흉한 적은 우리의 마음을 갉아먹기에’ 냉혹한 시간에 떠밀리지 않으려는 욕망의 표출이다. 다시 말하면 온갖 것을 녹이며 급류로 흘러가는 시간의 가속도로부터 낙오되지 않고 함몰되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그 흐름에 몸을 실으며 갈 길을 살피려는 기획인 것이다. 시간의 마디라는 징검다리를 통하여 시간을 운용해 보려는, 숙명을 향한 도전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의 목을 죄는 속도는 시간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현대에는 모든 공간이 시간으로 대치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대전-서울간의 측정단위가 150㎞가 아니라 50분으로 바뀐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공간이 변한 온갖 속도가 우리를 몰아붙인다. 그 속도로 변한 공간이 현대인을 떠돌게 한다.
농경사회의 삶은 주거지와 농토 주위에서 이루어지는 정착민의 삶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는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랑민의 삶을 산다. 이동전화기를 휴대하고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이리로 저리로 옮겨 다닌다. 스스로 운전을 하면서, 혹은 인터넷 바다를 항해하면서. 유랑하는 노마디즘적 삶의 양식에서 가치창출의 준거가 되는 것이 바로 ‘속도’다.
같은 맥락에서 현대인의 시선을 끄는 것은 정지된 아날로그 화면이 아니다. 역동적인 속도로 움직이는 디지털 동영상이다. 그래서 어떤 프랑스 철학자는 현대인의 유랑적 사유를 오로지 속도로 파악한다. 우리의 머릿속은 ‘더 빠르게(Citius) 더 높게(Altius) 더 세게(Fortius)’라는 이른 바 르까프(Le CAF)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이러한 유랑적 삶은 시간을 다투는 특성 때문에 간소화·휴대화·경량화라는 ‘이동성 가치’를 창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랑성이라는 현대성에 저항하는 것이 있다. 사진이다.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사진은 “침묵으로 소음에, 움직임 없음으로 가속에, 공간적 제한으로 정보의 분출에 저항한다”. 앨범이든 신문이든 그림책이든, 사진을 보고 있으면 소리가 멈추고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다. 성찰과 자성의 기회가 생긴다. 자연스럽게 지나온 길을 음미하게 된다. 10대 뉴스 사진을 보면서 우리는 그것을 경험한다.
수많은 이름의 송년회가 이어지는 12월이다. 이틀이 멀다하고 이어지는 송년회! 송년회도 사실은 세월에 실린 삶의 속도감에서 벗어나 보자는 것일 게다. 사진을 보듯 숨을 고르면서 되새겨보자는 것일 게다. 떠돌기에 저항하면서 잠시라도 멈추어, 내다보기 위해 돌아보자는 것일 게다.
먼 길을 가다가 혹은 산을 오르다가 힘에 부칠 때 우리는 뒤돌아본다. 돌아보면 우리가 온 길이 아스라하고 밟아온 풍경이 아름다워 보인다. 또한 벌써 상당히 올라왔다는 자부심도 생기며 저 길이 나았겠구나 싶기도 하다. 시간의 마디에서도 마찬가지다. 돌이켜보면 여러 유형의 만남과 체험, 회한들이 열 지어 서 있지만 지난날들에 대한 반추는 오히려 우리를 성숙시킨다. 우리가 갈 길을 비추어 준다. 이렇게, 이렇게 지나왔으니 저렇게, 저렇게 나가야겠다고 내일을 내다보게 한다. 그렇다! 송년회의 본질은 내다보기 위한 돌아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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