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39살 나던 그 해, 서른을 둘러싼 모든 것들과 그 하루하루가 너무도 아까운 나머지 사형수처럼 헤아리며 살았던 기억이 있다. 강이 흘렀어도 하류 어딘가에 도독하니 삼각주 하나는 챙길 연륜이라고, 그만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나이여야 한다고 스스로 다그치기도 했었다.
하여 당시 내 나이 39살을 어줍은 수필로 옮겨놓았는데, 지금 있었으면 한때의 준열함의 증거라고 우겨도 좋으련만, 유감스럽게도 그 글은 지금 도망가고 없다. 또 나로 하여금 금줄 같은 문장을 마구 풀어내도록 동인을 제공한 다산 정약용의 서른아홉 살, 하필 강진 땅 귀양살이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임종천이 갓 구워낸 '39살'이라는 시를 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돌을 던져 주시오. 돌을 던져 주시오'라는 시구가 꼭 심장에 대못을 치는 것 같았다.
또 그때는 날마다 깨알같은 메모지가 수북히 쌓일 정도로 나는 메모광이었다. 벽에 걸린 달력에도 '여성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지 이해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따위의 글로 빼곡이 적어야 직성이 풀렸다. 60년대 후반, 서양 젊은이들 사이의 유행어인 '서른이 넘는 사람은 믿지 말라'(Don't trust over thirty)의 '서른'을 '마흔'으로 바꿔서 써 놓기도 했다.
어쨌든 칼날같이 매서운 우리 현실에서는 39살은 고달픔의 상징이고 설 땅이 더더욱 좁아지는 40대로 가는 황량한 길목일 수 있다. 차라리, 가야할 때를 알고 떠나는 자의 뒷모습을 헤아리는 시인의 고통이 더 행복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39살! 그대들의 삶은 낭만을 포기한 대신, 삶을 바라보는 원숙한 기교가 생기기 시작할 나이이기에 빛난다. 한눈에 들어오는 강렬함은 덜하지만 마음을 파고드는 노련함이 이제 막 풍기기 시작해 좋다. 30대 내내 그랬고 40대의 종반을 향해 달리는 지금도 변함 없이 유난히도 나는 39살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어떤 미련이라 해도 좋다.
39살은 내게 늘 노고초처럼, 조팝나무처럼 피어오르는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다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39살을 다 보낸 이들과 새로 39살을 맞는 이들, 그리고 내가 준 '39살'이라는 시를 돌려본 39살짜리 후배들에게 격려를 보내는 일이다.
참, 이혼하는 여성의 평균연령이 38∼39세(남성은 41∼42세)이니 조심, 조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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