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토는 황폐화 초근목피 기아선상의 민생고, 어떻게 하면 살아남고 가족의 식생활을 꾸려가야 하는가? 형언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우리의 부모님들은 ‘나는 이렇게 생활하지만 내 자식만은 잘 키워야 되겠다’는 뜨거운 사랑과 교육열이 그 기초가 된 것이다. 그 당시는 국민일인당 소득이랄 것도 없었고 연간 수출이 ‘얼마다’라고 할 것도 없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3가지 기회가 우리에게 왔고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의 우리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첫째가 1960년대 초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수립을 하였으나 투자재원 돈이 있어야 하는데, 그 길이 열린 것이 광부와 간호사들이 2억만 리 독일로 돈을 벌러 나간 것이다. 그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으로 육영수여사와 그 젊은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독일 현장을 찾아갔을 때 애국가를 부르며 눈물의 통곡, 그 모습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조여 옴을 금할 수 없다. 독일 대통령께서도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박정희 의장께서 독일 국회 연설때 “우리 한국인은 평화를 사랑하고 양심 바른 사람들인데 우리도 잘살아야 되겠는데 돈이 없습니다. 귀국에서 돈 좀 빌려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개국 이래 처음으로 차관으로 1억 5천 마르크를 빌려올 수 있었다.
둘째, 1964년 월남파병이다. 10년간 연인원 38만 명의 우리 젊은이들이 월남전에 비둘기, 십자성, 맹호, 백마, 청용의 이름으로 참전해 여기서 거둬들인 수확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애국심, 가정의 소중함, 전투력, 경제력 확보, 국군 장비의 현대화, 월남전에서 탄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배에 싣고 가져온 장병들이었다. 10년간 전투참전은 우리 정부의 부담은 없었다. 미국정부에서 일체의 비용 봉급까지도 부담한 것이다. 월남전으로 인해서 경제 건설의 대 동맥인 경부고속도로, 포항종합제철, 대덕연구단지 건설에 뒷받침 된 것이다.
셋째, 월남전이 끝나면서 철수함에 따라 열사의 중동건설 현장에 근로자로 참여의 기회가 온 것이다.
위의 3가지 현장의 피와 땀과 눈물, 목숨 건 생활로 오늘의 대한민국 만들기에 360개의 대학이 세워질 수 있었던 사실을 바로 봐야겠다. 이 사실의 현장을 어떠한 의미로 부정할 수 있는가? 이 역사의 현장을 소홀히 하거나 잊어서는 안 된다. 86 아시안 게임, 88 올림픽, 월드컵, OECD 회원국, 5000억달러 무역국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가정의 선을 찾아 관리해야 한다. 학교 교육에도 문제는 있다. 이러한 역사 생활현장교육을 분명하고 바르게 해야 한다. 가정에서 자녀와의 대화 시에 생활 교육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젊은이들은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그리고 보답해야 한다. 세계에서 두 번째 머리 좋은 자랑스러운 인재들이다.
이 터전에서 세계 일류국가, 일류국민을 만드는 것으로 보답하기를 우리 모두의 소망으로 이루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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