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진의 충청비사] 朴대통령 평가 시각 양분

[안영진의 충청비사] 朴대통령 평가 시각 양분

32. 10·26(궁정동 사건)을 돌아보며

  • 승인 2005-12-01 00:00
  • 前 중도일보 주필前 중도일보 주필
1979년 대구에 행사차 내려갔다 비보 접해
‘왜? 어떻게?’ 앞으로의 정국 생각에 불안감
군사정권 지성인들 ‘저항-참여’ 갈등의 세월
친일문제·여순반란사건 등 객관적 역사정리 필요


필자가 10·26(궁정동사건) 소식을 접한 건 다음날 새벽 대구의 어느 여관방에서였다. 그 때 대구는 전국민속경연대회 개최지가 되어 시내가 온통 축제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그러니까 필자가 ‘예총’충남지회장을 맡고 있었을 때 이야기다.

충남은 전년도인 1978년 황도 ‘붕기풍어놀이’로 ‘대통령상’을 받은 바 있어 1979년 대구대회에서 이를 시연하기로 되어 있었다.




道高온천에서 있었던 일

그래서 500여명의 단원을 이끌고 대구로 내려갔다. 출연단원이 많다보니 4곳으로 나눠 배치하고 쥐꼬리만한 격려금과 맥주상자를 밀어 넣고서야 회장체면을 세웠다. 그리고 신문사일 때문에 다음날 아침 일찍 올라와야할 형편이었다. 그날 밤 공보실장 M씨와 술잔을 기울이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꼭두새벽에 누군가가 방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통에 눈을 떴다.

“난리가 났어요. 난리요!” 오밤중에 웬 수다인가 싶어 “경망스럽기는…. 저래가지고 군수 나가겠어?” 혀를 차며 방문을 열자 그는 소형라디오를 들고 왔다. 그때 라디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박정희 대통령각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김성진 장관의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방송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 듯 했다. “어이, 야!”라는 황급한 누군가의 말과 문을 ‘쾅’닫는 소리까지 울려 퍼졌다.

‘왜 대통령이 작고했을까? 향후 정국은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에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쯤 되면 전국민속경연대회 따위는 안중에 들어올 리 없다. 혹 또 다른 사태는 없는가?’ 갖가지 생각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각 여관의 책임자를 불러 대기시켜 놓고 주최 측과 충남도의 지시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는 일찍 아침을 들 요령으로 인근식당을 찾아갔는데 그 곳 분위기 역시 예사롭지가 않았다. 꽤 큰 식당인데 손님에겐 신경이 가지 않는 듯 여주인은 어린애에게 젖을 물린 채 소리 내어 울부짖는다. 아이고 땜하는 식의 호곡(號哭)이다. “어느 역적 놈이 대통령을 해쳐? 천벌을 받아라!”고 외치며 손바닥으로 카운터를 내리친다. 안방을 들여다보니 새마을부녀회 무슨 간부인 듯싶었다.

남편은 탁자를 챙기며 뱉듯이 한마디 외쳤다. “총으로 시작하더니만 총으로 끝났구먼. 허허!” 이 한마디가 지금도 귓전을 때린다. 부부간이지만 사태를 놓고 바라보는 눈은 그렇게 달랐다. 故박정희 대통령을 평가하는 국민들의 시각은 지금도 양분되어 있는 듯하다.




‘정치란 行動하는 예술?’

25일은 삽교천 방조제행사가 있던 날이었다. 박대통령은 그날 도고온천호텔에서 쉬고 다음날 상경하는 걸로 스케줄이 짜여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아침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고 했다. 박대통령은 오전 수덕사에 들렀다가 도고온천으로 돌아왔다.

이때 전용헬기의 시동을 거는데 호텔에서 사육하는 사슴이 뛰어들어 즉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뿐만 아니었다. 서로 으르렁대던 측근들이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경호실장이 정보부장을 발길로 걷어차는 바람에 정보부장은 헬기 아닌 전용차로 상경을 했다. 그날 밤 궁정동에선 총성이 울려 퍼졌다. ‘총으로 시작해서 총으로 끝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 후라 하겠다. 독재자를 쐈다면 그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또 다른 군벌이 등장 ‘80년 서울의 봄’은 줄 끊어진 ‘연’처럼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 시대 시민들은 숨을 죽이며 살아왔고 정치군인들과 욕망에 찬 정치인, 지식인 군(群)은 다투어 권력의 우산 밑으로 모여들었다. “마음이 썩 내키는 건 아니지만 유한(有限)한 인생이 돼서….”이렇게 합류들을 했다. 학자, 언론인, 군인, 인텔리들은 그 때 참여냐, 저항이냐를 놓고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 시절 햇빛을 봤던 인물들이 요즘도 정치활동을 하고 또 배후에서 조종하는 걸 지켜본다. 반면 군사정권에 저항, 곤혹을 치렀던 인사들이 오늘의 주역으로 역사와 시대를 주도하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는 정치를 ‘행동하는 예술’이라 했다지만 국민들에게 감명을 줄만한 작품을 내놓은 예는 그리 많지 않았다. 또 정치란 ‘난로(스토브)와 같은 것이 되어 너무 가까이 가면 화상을 입기 쉽고 반면 떨어져 있으면 동상을 입는다’는 말이 있다. 그 때문일까. 일부 지성들은 제3지대(완충)에서 딴전을 부리기도 하고 뒷전에서 볼멘소리를 하는 경우를 보아왔다. 때로는 군맹(群盲)이 상평(象評)을 하듯…. 그래서 ‘지성은 창백(蒼白)하다’고 손가락질 하는지도 모른다.




일부 지성들의 ‘슬픈 隱語’

5·16 이후 5·6공화국까지 30년간을 ‘민족의 융성기’라 찬양을 하지만 군화에 짓밟힌 민족의 수난기라 평하는 이도 없지 않다. 그래서 3부(입법, 사법, 행정) 꼭대기에 군부(軍部)가 있다고 설레설레 고개를 내젓는 이도 있었다. 30년 세월, 집권층에선 단군 이래 처음 맞은 진운기라 자평을 하지만 오로지 굴종과 획일(劃一)을 강요당한 ‘빙하기’였다고 혹평하는 이도 있다. 아마도 인권을 놓고 하는 말인 듯싶다.

어떻든 고도성장과 근대화라는 명분(?) 앞에 자유와 인권, 언로(言路)는 여지없이 희생당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 무렵 어느 수장이 ‘싱가포르’ 이광요 총리를 만나 나눴다는 이야기가 걸작이다. “한국정치의 발전상을 보니 반갑다”는 인사말에 “90%는 잘 돌아가는데 나머지 7~8%가 말을 영 안 듣는다” 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이광요 총리는 “정치에선 90%의 다중(多衆)도 중요하지만 나머지 7~8%를 위해 정치는 존재하는 것”이라고….

차라리 누군가가 마구 지어낸 우스갯소리라면 속이 편할 것 같다. 이런 시대를 나이먹은 기성층은 살아왔다. 그 시절엔 지식인 사이에 눈짓하며 주고받는 은어(隱語)가 있었다. 예를 든다면 “‘사디’의 계절에 안녕하셨는지?”라거나 “‘마조’의 물결이 볼만 합니다.” 등이 그것이다. ‘사디’란 사디즘(Sadism)의 약자로 심층심리학의 비조 S. 프로이트에서 비롯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마조’란 마조히즘(Masochism)의 약자로 이는 ‘사디즘’의 상대어다.

이 말은 원래 문학용어로 오스트리아의 작가 ‘자허마조흐’의 변태성 작품에서 유래를 찾는다. 그러나 문학성을 떠나서는 ‘변태성욕’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또 ‘악의 꽃’으로 유명한 ‘보들레르’는 ‘잔악성과 향락(享樂)성은 원래 동일한 감각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좀 더 확대해석하면 ‘사디즘’은 매우 공격적이며 상대에게 고통을 가해서 몸부림치는 걸 지켜보며 쾌락을 느끼는 그런 인간형을 말한다.

그러니까 국민을 들볶으며 쾌감을 느끼는 지도자를 연상, 은어를 썼던 걸로 ‘네로’나 ‘히틀러’ 그리고 역사에 나오는 폭군들이 그 대상이라 하겠다. 그럼 ‘마조히즘’을 들먹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성행위에서는 남성의 가학증(加虐症)이 그렇고 정치적으로는 독재자들로부터 학대를 받으면서도 열광하는 변태성격….

순치(馴致)된 채 주체성을 못 가리는 국민이라 야유하는 뜻도 한 가닥 숨겨져 있다할 것이다. 군사독재에 정면대결은 못하고 그렇다고 합류하기는 싫고 눈에 거슬리는 현실을 자학하는 경우…. 그래서 ‘제8요일’, ‘5계절’, ‘25時’, ‘제3人間型’이라는 말이 성행했는데 이 모두 궤(軌)를 벗어난 현실을 비아냥거리는 은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았다.




박대통령과 유성온천

박대통령은 유성을 좋아했다. 당시 만년장호텔(사장 權서정)은 그래서 ‘정치의 산실’ 또는 박대통령의 제2집무실이라고까지 소문나 있었다. 5·16쿠데타 이후 선글라스에 권총을 찬 혁명주체들이 떼 지어 찾았던 호텔이기도 했다. 큰 정책을 터뜨릴 때나 무슨 일을 꾸밀 때면 꼭 유성을 거쳤다. 만년장 특실(귀빈실)엔 G모라는 당번이 있었는데 배포 좋기로 이름난 사장(일명 권대포)도 그녀에겐 지청구를 못했다. 그만큼 성실성과 품격을 갖춘 여인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녀는 오랜 세월 박대통령의 당번이었다. 그녀는 70년대에 들어서며 호텔에서 나와 도청 앞 선화동에 요정을 냈는데 큰손님이 아니고는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그런 술집이었다. 젊은 기자시절 필자는 그곳에 들러 외상술 깨나 축을 냈다. 사장인 그녀는 영남억양을 하며 해방 후 일본에서 귀국한 독신녀라 했다. 그것 말고는 별로 알려진 게 없었다.

미인은 아니지만 푸냥한 얼굴에 사시시 눈웃음치는 그런 여성이었다. 박대통령이 내려오면 이집에서 식사를 하는 통에 골목은 기관장, 유지, 정치인들 차로 빈틈이 없었다. 그 무렵 기자는 호기심에서 접근을 시도했다. 박대통령과 최고위원들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깊은 곳까지는 터놓지 않는다 해도 평범한 낙수거리라도 찾아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천기를 누설하라는 것은 아니니 평범한 이야기라도….

그것을 엮어 책을 쓰고 만약 대박이 터졌다하면 영화감독이 달려들 것이다. 당신은 ‘배정자’처럼 유명해질 수 있다. 그때는 이 가난뱅이 기자도 팔자를 펼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후 조금씩 평범한 이야기를 터놓기 시작했다. 여자는 역시 여자였다. 그녀는 이쪽을 향해 이런 제의를 해왔다. 중도일보 영화제 때 주연배우, 가수, 감독 등을 그녀의 요정으로 안내하면 술값은 안 받겠다고….

그 후 그녀의 제의를 어렵지 않게 이행했다. 최무룡과 작곡가 박춘석 등과 하룻밤 어울려 즐겁게 마신일이 있다. 그 후 말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는데 이 대목은 수확이었다. “우리는 본연의 임무(군부)로 돌아갑니다.” 박의장이 손을 떨며 대국민성명을 발포하기 전날 밤 이야기를….

최고회의 해산파티도 유성 만년장이었다. 여자의 눈에도 권위와 의리란 저런 것인가 하고 놀랐다는 것이다. 혁명주체들은 밤 깊도록 술을 마셨는데 헤어지는 자리라 그런지 예절이 없더라는 것이다.

전에는 “네! 네! 각하”하고 절절매던 이가 이튿날 아침엔 주먹으로 ‘쿵쿵’ 노크를 하며 웃옷도 안 걸치고 들어오더라고 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면서 이렇게 말했다. “옷도 안 벗고 침대에 그냥 엎드려 의장님 혼자 흐느끼는 것이었어요.” 혼자 몸부림치는 지도자의 모습을 설명해주었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고 뭐랄까…. 그렇게 당당하고 존엄스럽기까지 했던 지도자가 흩어지는 마당에선 혼자더라고 했다. ‘비스트(짐승)’의 울부짖음으로 보였을까.

의성도 가성도 모성(흉내)도 아닌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울부짖음, 그리고 헤어질 때는 혼자더라고 했다. 어떻든 인간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크나큰 치적으로 꼽는 ‘경제성장’, ‘자주국방’, ‘5·16쿠데타’, ‘여순(麗順)반란사건’, ‘친일문제’ 평가 등에선 감정이나 정파를 떠나 균형 잡힌 시각으로 정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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