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무소 앞마당에 파란 봉우리가 하나 솟아있다. 한적한 시골 보금자리에서 잠을 자던 새벽, 난데없이 ‘보쌈’ 당해 옮겨진 배추들이다. 배추와 떨어질 수 없는 부추, 쪽파, 마늘, 소금, 젓갈, 고춧가루들도 곳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새벽잠 떨치고 동사무소로 하나둘 발걸음 배추절임. 쪽파다듬기 등 맡은일은 각각
씻고 다듬고… 말하지 않아도 손발이 척척 “이웃돕는 일이라 힘들어도 마음은 즐거워”
날씨만큼 삭막하기 그지없지만 ‘뽀글뽀글한’ 머리의 아줌마들이 하나 둘 씩 나타나자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다. 전형적인 아줌마들을 비롯해 머리에 하얀구름을 얹어놓은 할머니, 염색한 젊은 아낙네들까지 모두들 다양한 모습으로 배추곁으로 다가온다.
깊게 파인 주름, 윤기없는 피부,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이지만 결코 부끄럽지 않은 그들, 바로 은행·선화동 새마을부녀회와 자원봉사회 회원들이다. 갑부들이 남겨놓은 메마른 ‘허세’를 걷어버리고 촉촉한 ‘정’이 넘치는 동네로 만들고 있는 이들이 바로 은행·선화동 최고의 명물이다.
조용했던 동사무소 앞이 시끌벅적하다. 매일매일 보는 얼굴들이지만 그들의 수다는 멈출 줄 모른다. 반가움이 도를 넘은 지 오래다. 그들에게는 그들 자신들이 바로 삶의 하나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소박하지만 ‘사람의 향기’가 곳곳에 배어있는 이곳에서 오늘, 사랑이 듬뿍 담긴 김장이 담가진다.
“야! 왜 이렇게 늦었어, 내일모레 70인 나도 벌써 왔는데, 빨리 고무장갑 끼고 준비해.”
‘김장담그기’ 35년의 독보적 경력을 자랑하는 김용희(65)씨가 1시간정도 늦게 온 후배회원을 나무랐다.
하지만 김씨는 회원들을 호통칠 수 없다. 대부분의 후배회원들 역시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생계를 위해 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곧바로 ‘노상회의’가 시작된다. 이은분(57) 새마을부녀회장과 윤정순(55) 자원봉사회장의 ‘명령’에 따라 회원들의 움직임에 빈틈이 없다.
배추절임조와 부추, 쪽파 다듬조 등 몇 개의 조가 만들어지더니 각자의 위치로 이동한다. 그들의 손에는 모두 엉덩이만 걸칠 수 있는 작은 의자가 쥐어져있다.
반나절 동안 서서 일하는게 사실상 불가능한데다 움직일 때마다 뼈에서 들려오는 ‘뚝딱’소리, 대부분 50대를 훌쩍 넘긴 ‘움직이는 종합병원’인 이들에게 작은 의자는 필수 작업도구다. 서서 일하려고 몇 번씩이나 시도했지만 세월만 한탄스러웠단다.
“기자들이 왔대, 큰일났네. 오늘 늦어서 화장도 안하고 모자만 쓰고 왔는데 어떡해.” 들이대는 카메라를 보더니 다소 젊은 회원이 얼굴을 숙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이옥자(65)씨가 한마디 한다.
“그 정도면 아직 한창인데 뭘 그래? 그리고 아무리 돈을 들여 화장하고 비싼 옷 입으면 뭘 해. 너처럼 더 힘든 이웃들을 도우려는 사람이 정말 예쁜 사람”이라며 어깨를 두드린다.
손놀림과 함께 입이 쉴새없이 움직인다. 그래도 실수하는 법이 없다. 회원들간의 손발도 척척 맞는다. 실수와 빈틈없는 솜씨, 쉴 새 없는 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오랫동안 ‘사랑의 김장 담그기’와 함께 해왔기 때문이다.
김장비용은 그들이 스스로 벌어들인 돈이다. 매년 자신들이 손수 만든 음식, 비누를 비롯해 기증받은 헌 옷 등으로 바자회를 열어 마련한다.
독거노인 80세대와 소년소녀가장, 차상위계층 등 150세대에 10포기씩 전달한다. 이 뿐이 아니다. 매월 한번씩 밑반찬을 만들어주고 일부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이불, 전기장판, 연탄 등도 나눠준다.
하지만 이들 역시 넉넉지 않은 형편이다. 예전에는 김장 담그는 날에 주변 식당에서 밥도 줬단다. 하지만 이젠 옛말이다. 모두들 경제적 형편 때문에 나서기가 어려운 분위기다.
정난호 동장은 “어려운 사람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잘 알 듯이 비록 이들도 넉넉하지 않지만 단 한 번도 어려운 이웃을 외면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김치를 먹는다. 하지만 먹어본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김장김치 맛을 잊은 사람도 많다. 자식으로부터 외면당한 노인들, 부모의 사랑을 느껴보지 못한 소년소녀가장들, 외로움과 가난에 지친 이들에게 김치는 너무 비싼 음식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매년 이맘때면 김장을 담근다. 대부분은 자신들의 가족이나 친지들을 위해 배추를 사서 김치를 담근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서도 김치를 담근다. 가난이라는 고통과 외로움을 알기 때문이다. 김치 한 포기가 전해줄 따뜻함과 희망을 알기 때문이다.
30여년동안 김치를 담가온 이은분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도 힘든데 왜 이러는 줄 알아? 우리보다 더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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