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비단 종교와 과학에서만 나타나는 특수현상이 아닌 정치나 다른 분야에서도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일 것이다. 인간은 한 잔의 커피, 한 권의 책, 한 잔의 술, 다정한 말 한마디, 따스한 손길 등과 같이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남이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갖고도 전혀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종교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가장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용서’가 있다. 용서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벌을 주지 않고, 너그럽게 보아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있기도 하다. 그래서 티베트 불교 최고의 정신적 지도자인 14대 달라이라마의 ‘용서론’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 우리가 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포함해, 용서는 그들과 하나가 되게 해 준다”고 한다. 이는 기독교의 ‘원수에 대한 사랑’과 같이 무조건적인 사랑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고통과 상처를 준 사람을 미워하면서, 결코 내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고, 행복해질 수도 없다.
흥미롭게도 달라이라마의 용서는 불교의 핵심사상인 ‘연기’에 근거한다. ‘인생연기’는 모든 존재가 직접원인인 ‘인’과 간접원인인 ‘연’에 따라 생긴다는 사상이다. 사물과 생각이 시간적 인과율과 시공간적 상호연관성에 의해 서로 연계되고 의존하는 그물망을 이룬다는 것은 어찌 보면 불교뿐 아니라 자연의 이치이기도 하다.
자연 현상의 그물망 속에서 이 신문종이와 구름, 런던의 꽃과 고양이, 태풍과 나비의 날갯짓의 연결고리를 찾아낼 수 있다. 물론 과학은 이러한 상호의존적 그물망의 사유적 관점에서 더 나아가 상호동역학 관계의 경중과 완급을 따지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정량적으로 연결망을 모형화하여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종교와 과학은 매우 이질적인, 때로는 상호 모순적인 분야로 인식되어 왔지만, 최근 꾸준히 상호 교류와 보완 협력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한 예로 티베트 승려들과 다양한 그룹의 신경학자, 물리학자, 철학자들은 1987년부터 매년 ‘마음과 인생에 대한 학술회의’와 상호 연구를 통해 ‘물질’과 ‘삶’의 본질에 대한 상호 인식의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다. 달라이라마에 따르면 ‘종교와 과학 모두가 인간의 삶에 큰 책임을 지고 있으며, 고대의 지혜와 현대과학이 함께 긴밀하게 협력할 때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와 과학이 상생해본 적이 있는지, 그리고 가능성이 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진심으로 종교와 과학이 어떤 의미에서 서로 공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바로 오늘 일어나고 있는 이 현실이 우리가 숨쉬고 있는 한국이라면 더더욱 종교의 지혜와 과학의 성과를 잘 아우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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