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주시 공산성, 무령왕릉서 펼쳐진 제51회 백제문화제에서 백제 혼불 채화식이 지난 7일 공주시 웅진동 정지산 천제단에서 열렸다. |
“백제는 왕관 없어” 亞석학의 무지에 충격 백제여인의 정절 알리려 野史 집필하기도
문화의 달 10월도 서서히 저물어 간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펼친 축제는 우리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 주었다. 그 축제를 지켜보면서 우리는 희열을 느끼는 한편 또 다른 측면에선 아쉬움 같은 걸 떨칠 수가 없다. 우선 민족 3대 축제의 하나로 꼽히는 ‘백제문화제’에 대해서도 앞날을 위해 하고 싶은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예년보다 규모와 질에 있어 발전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할 일은 많다.
쇠퇴기와 종말도 함께 논의돼야
①백제의 역사 정리는 여전히 미완상태 그대로다. 시조라 할 ‘온조’와 ‘비류’의 골격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점. ②무령왕의 출생지가 어디인지 그 자체를 놓고도 이런저런 설이 있다. 일본에선 ‘사마왕’이라 이르며 왜국출생설이 무성한데 이 점 역시 서둘러 정리해야 한다.
③역사란 전성기뿐만 아니라 쇠퇴기와 종말까지를 아우르는 작업이라 보아 파국 때의 정황도 포함시켜야 옳고 ④역사가 오랜 나라에서도 정사(正史)와 야사(野史)는 공존을 하고 있다. ⑤그러나 백제는 야사(전설)자체도 많지 않으니 이 또한 개발이 시급하다. 간혹 야사를 비과학적이라 해서 폄하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정사를 계란에 비유한다면 그것은 ‘노른자위’요, 야사는 표피(껍데기)라 보아도 잘못이 아닐 것이다.
백제사를 논하고 이를 테마로 축제를 벌일 경우 저 처참했던 종말을 배제하고는 설득력이 없다. 당나라 소정방에 의해 끌려간 의자왕 일가와 제후 측근들은 중국 낙양(洛陽)에서 멸종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한 가지, 정사와 야사(전설)는 상호 빙탄(氷炭)지간이 아니라 순치(치아와 입술)관계라 해도 잘못이 아니다. 백제 이야기를 꺼내다 보면 야사가 정사구실을 하는 대목이 수두룩하다.
백제가 망할 무렵 부여 성안에선 신라의 첩자와 상궁이 내통을 한다느니 심지어 용상에 흰 여우가 앉았다는 등 궁 안의 느티나무가 ‘백제는 망한다!’며 밤마다 울어댔다고 한다. 의자왕의 방탕을 놓고 하는 말이지만 상식으로는 이해 못할 일들이다. 뿐만 아니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부여가 무너질 때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삼천궁녀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삼천궁녀라니…. 혹 300명이라면 또 모른다. 당시 부여 인구가 얼마였을까. 백제여성의 정절과 당시 상황을 실감 있게 전하려다 보니 그리 과장되었을 것이다. 또 ‘구드래’의 자온대(自溫臺)만 해도 임금이 나오시기 전 신하들이 미리 불을 지펴 데워놓은 걸 갖고 돌 자신이 그렇듯 조화를 부린 것으로 전해진다. ‘풍신수길’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몸종시절 신발을 가슴에 품었다 내놓았다는 일화와 다를 게 없는 내용이다.
부소산 낙화암 옆엔 조룡대(釣龍臺)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세인들은 당나라 소정방이 그 바위에서 백마대가리를 미끼로 용을 낚았다고 믿는다. 소정방이 부여를 공략하려는데 백마강에 갑자기 짙은 안개가 끼어 진격이 어렵게 되자 용의 조화라 해서 백마머리를 미끼로 용을 낚아 올렸다. 그래서 조룡대라 전해 온다. 또, 소정방이 용을 낚을 때 무릎을 꿇은 그 자리가 푹 패어 있다. 그러나 이는 전설이요, 야사일 뿐이다. 아무리 역발산의 장수라 할지라도 무릎꿇은 바위에 흠집을 낼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조룡대는 백제왕(용)이 낚시질한 바위라는 게 정답이 될 것이다. 어떻든 정사보다는 야사가 듣기에 재미있다.
조선통신사의 엇갈린 보고
‘조선통신사’에 있어서도 예외 없이 야사는 뒤따른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9개월 동안 일본에 머물며 침략징후를 탐지해온 통신사들의 그 보고내용만 봐도 그렇다. 그때 김성일은 침략징후가 보이질 않는다고 보고를 했고 황윤길, 허성일은 ‘꼭 병화(兵禍)를 일으킬 무리’라고 보고 했다.
그러나 임금은 김성일의 손을 들어줬다. 김성일은 퇴계의 문하로 강직한 선비였지만 동행했던 黃과 許 두 사람은 서인이고 자신은 동인이다 보니 이들과 입을 맞추기 싫었던 것이다. 조선조시대의 선비들은 이렇듯 파쟁을 일삼았다. 그 결과 조정에선 성곽의 보수, 병력증강, 훈련과 대비를 외면했다가 화를 당했다. 통신사는 한번 건너가는데 300~500명 선이지만 그들이 보고한 내용은 구구각색이었다.
또 다른 통신사 중에도 전쟁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한 자가 있었다. 그는 ‘풍신수길’의 관상을 보고 점을 쳤다는 것이다. 물론 야사다. 상오(골상)가 꼭 독사처럼 생겨먹었으니 독사란 원래 물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현해탄(대한해협) 같은 바다를 건너오지 않을 것이라 단정했다. 또 한 사람은 골상이 독사가 아니라 원숭이 상오라 해서 원숭이 역시 큰 바다를 기피할 것이라 했다는 게 아닌가. 아무리 옛날이라 하더라도 관상이나 살피는 통신사라니….
갈릴레오와 괴테 ‘두개의 역사’
우리 동양뿐 아니라 선진 서구에서도 정사는 가려지고 야사가 행세하는 소위 일식(日蝕)현상을 우리는 흔히 보아온다. 저 유명한 지동설(地動說)과 천동설(天動說)의 경우만 해도 선후가 바뀌어 있다고 보는 이가 적지 않다. 일반적으로 교회나 대사교(大司敎)의 횡포만 전해지고 있다는 평 또한 만만치 않다. 그때는 교회가 정치관여를 공공연하게 할 때여서 한 사람의 위대한 과학자를 옹호하기 보다는 교파와 민심을 더 걱정했다는 충정 같은 건 별로 알려진 게 없다.
‘코페르니쿠스’가 곤혹을 치른 것은 사실이며 ‘갈릴레오’ 또한 수난을 당했다지만 실제와는 다르다는 이야기다. 교회가 지동설의 오류를 포고하고 ‘갈릴레오’를 재판에 회부한 것은 사실이다. 과학자 갈릴레오에겐 더 없이 부당한 재판이었다. 문제의 저서 천문학대화(天文學對話)는 옛 친구 교황 ‘우르바노 8세’의 허가를 얻고 출판을 한 것이다.
교회 측의 공기가 험악한 것을 알고 재판관은 한밤중에 슬그머니 ‘갈릴레오’를 만나 설득시켰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69세의 노학자는 지조를 굽히고 양보를 했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종신금고를 받으면서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큰소리친 걸로 전해진다. 하지만 전향한 ‘갈릴레오’에겐 판결의 완화는 물론 ‘시에느’ 대사교는 연구와 저작의 지원은 물론 방문까지 허락했다는 게 유력한 설이라 한다.
이렇듯 역사적인 대사건이나 인물은 과대포장을 하기도 하고 미화의 선을 넘어 신격화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또 한 예를 들어보자. ‘파우스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으로 유명한 4대 시성 중 한 사람인 ‘괴테’가 숨을 거두는 장면은 어떠했는가. “창문을 열어다오! 그리고 빛을!” 죽어가면서 외친 걸로 되어 있다. 죽는 순간에도 아름다운 시 구절을 외친 걸로 세상은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깔딱깔딱 숨이 끊어지려는 순간 어둡고 답답한 나머지 창문을 열라고 발악을 한 것이다. 이렇듯 정사보다 야사가 행세하는 경우가 있다.
30여 년 전 일이다. 지금 들춰보면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는 그 알량한 내용의 ‘百濟七百年.’ 그 책속에 ‘血脣堂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이 잡문은 무령왕릉 발굴 때 받은 충격으로 야사(野史)형식을 빌려 엮어 본 ‘픽션’이다. 때문에 ‘믿거나 말거나’식의 30대 젊은 객기로 끄적거린 졸문이라는 걸 우선 밝혀둔다.
무령왕릉 발굴 때 받은 충격이란 이런 것이다. 현실에선 ‘지석’을 비롯해 썩은 목관, 온갖 부장품, 쇠 신발, 요대, 대검, 수석 등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왕관이 나오지 않아 어느 기자가 “단장님 백제 때는 왕관이 없었습니까?” 그저 한마디 던져 본 말이었다. 이에 발굴단장 역시 지나치는 말처럼 답을 했다. “백제에는 왕관이 없었습니다”라고. 그러나 얼마 안가 그 찬란한 왕관의 장식(화염문)이 발견되었다. 왕관과 두개골은 모두 부식해서 가라앉고 천장에서 내려온 나무뿌리(세근) 등이 그 관식을 감싸 버려 마지막 청소과정에서 그것이 드러났다.
일이 이에 이르자 발굴단장은 “정정합니다. 백제에도 왕관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나오자 장내에선 폭소가 터졌다. 아시아의 석학이라 자처하는 단장도 백제를 이렇듯 우습게 보아왔던 것이다. 인디언에게도 남양의 사모아족과 아프리카 원주민 추장에게도 수장의 표지는 있기 마련인데…. 이에 자극을 받아 공주, 부여를 자주 찾았고 학자들이 무관심하다면 기자라도 나서야 한다는 생각에 만용을 부려 본 것이다. 치졸하지만 그대로 옮겨보자.
혈순당(血脣堂) 이야기는 ‘픽션’
해변에서 있었던 일로 서산, 보령지방이라 해도 상관이 없다. 어떻든 그곳에 남매가 살고 있었다. 남동생은 ‘맷돌’이라 해도 그만이고 돌이라 부른대도 문제될 것이 없다. 누이는 ‘채옥’이라 했는데 백제시대 민초(民草)들에겐 성(姓)이라는 게 없고 양반이라야 성을 가질 수 있었다니 굳이 ‘돌이’남매의 성(姓)을 따질 필요가 없다. 그 무렵엔 解씨, 眞씨, 沙宅씨 木형씨, 燕씨, 白씨, 國씨, 扶餘씨 등 겨우 여덟 가지 성이 행세를 했다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어떻든 ‘돌이’는 누나와 단둘이 해변에서 살고 있었다. 과년한 누나에겐 약혼자가 있었는데 그는 어부로, 고기잡이에 나갔다가 태풍을 만나 안타깝게도 익사를 했다. 그러니 남매의 슬픔이 어떠했겠는가. 사태가 이에 이르러 누나 ‘채옥’은 슬픔을 가눌 길 없어 약혼자를 앗아간 바다에 몸을 던져 뒤따라갔다. 동생 ‘돌이’는 이 예기치 않은 충격에 한숨의 나날을 보내던 중 누나를 그리는 마음에 대청 벽에다 누나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비록 화구(畵具)를 갖지 못한 그였지만 그림 솜씨가 뛰어난 그는 갖가지 풀잎과 꽃송이를 짓이겨 물감을 대신해 몇 달 만에 초상화를 완성시켰다. 이 그림은 윗니로 아랫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약혼자를 앗아간 한 맺힌 바다를 응시하는 그림으로 더 없는 걸작이었다. ‘돌이’는 누나의 초상화와 일상 대화를 나누며 조석으로 상식(上食)을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무렵 젊은 나그네가 찾아와 하룻밤 재워줄 것을 요청, 이를 받아들였다. 이튿날 아침, 나그네는 이 그림을 보는 순간 불순한 충동에 슬그머니 벽에 그려놓은 여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말았는데 이때였다. 별안간 벽이 흔들리고 대청마루가 진동하더니 그 초상화 입술에선 낭자하게 선혈이 흐르는 게 아닌가. 이에 크게 놀란 나그네는 죄책감에 진혼(鎭魂)의 굿을 올리고 거듭거듭 ‘돌이’에게 사죄를 했다. 이 소식이 이웃으로 전해지자 마을 사람들은 뜻을 모아 사당을 짓고 혈순당(血脣堂)이라는 현판까지 달아주었다. 이는 백제 여인들의 정절(貞節)과 백제인의 그림솜씨를 알리는 뜻에서 필자가 지어낸 ‘픽션’이다. 그러니 굳이 따진다면 이 또한 야사다.
▲ ‘조선통신사행렬도’(부분·1636년), 종이 바탕에 채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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