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맹창호 사회부 차장 |
가로 120㎝, 세로 80㎝의 크기에 순백색의 아무런 표식이 없는 백기(白旗)는 경찰서 유치장에 단 한 명의 입감자(入監者)도 없음을 자축하는 신호다. 이젠 치안 상태의 척도도 될는지도 모르겠으나 태평세월의 한 상징이었다.
오늘날 백기 게양은 도시지역, 특히 1급 경찰서에서는 아주 드문 일로, 대전 북부경찰서가 올해 단 한 차례만 게양했을 뿐 최근 5년 동안 사용된 적이 없다. 1급 경찰서마다 발생하는 사건이 한해 수천 건, 하루 입감자가 10여명에 달해 유치장은 빌 틈이 없다. 백기 게양을 본 적이 없는 신참 경찰관들은 그런 전통조차도 잘 모른다.
그래도 경찰서의 백기들은 창고에서 혹은 서랍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맑은 햇살에 펄럭일 날을 오늘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경찰서 강력수사팀의 사무실 풍경을 보면, 그러나 그 기다림의 끝이 아직 가깝지는 않아 보인다. 보험금을 노리고 일가족을 몰살한 가장의 인면수심(人面獸心), 중풍에 걸린 어머니를 3년째 모시다 늘어나는 빚을 견디다 못해 어머니에게 흉기를 들이대며 자살을 강요한 아들 등등….
강력수사팀 사무실은 ‘백기가 오를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을 대변해 주고 있다. 날마다 접하는 경찰서의 살풍경 속에서 하루쯤은 백기가 걸려 게양대를 바라보며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한번쯤여유를 가져보는 게 경찰의 날을 맞아 사건담당기자도 품어보는 희망인데, 매일 사건과 씨름하는 경찰관들이야 더 말할 게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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