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 요즈음 방송은 어느 방송사의 어느 프로그램이든 웰빙을 빙자하여 먹을거리 소개와 시식에 경쟁을 하는 듯하다. 카메라 앵글은 어김없이 뭔가를 먹는 유명 연예인이나 리포터의 입술과 혀를 클로즈업하여 그 움직임과 미세한 떨림까지, 심지어 씹거나 핥는 소리까지 담아낸다. 이른바 식탐을 보급, 증폭 그리고 재생산하면서 동시에 관능을 자극한다. 그러면서 판박이 웰빙 운운하며 마무리한다. 이어지는 드라마에서는 온갖 불륜이 얽히고설킨다. 우리가 추구하는 참살이는 고작 이런 것인가.
아내에 대한 사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정력에 좋다면 중국 태국 안 가리고 가서 뱀을 잡아먹고 오는 사람들, 당면한 일을 처리함은 물론이고 잠재적 일에 대한 연구와 고민을 해야 할 시간에 웰빙한다고 짝을 지어 필드에 나가는 사람들, 그러면서 건강과 장수 그리고 웰빙에 대한 자신들의 관심과 노력을 자랑하는 사람들, 이들이 사는 모습이 과연 참살이인가.
뚜렷한 사회적 삶의 목표가 없으면서 ‘우선 건강하고 보자’는 심사는 국가 장래에 대한 비전도 없으면서 ‘우선 되고 보자’는 정치지망생과 다르지 않다.
근본적으로 웰빙에 관한 노하우(know-how)에 앞선 노화이(know-why)에 관하여 사회구성원들이 공감하는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말을 바꾸면 “무엇이 웰빙인가?”, “왜 웰빙해야 하는가?”에 관한 철학이 사회 전반적으로 부재하거나 부족하다는 것이다. 거의 맹목적인 ‘건강 우선주의 신드롬’ 대신에 “육체적 웰빙말고 정신적, 정서적, 사회공동체적 웰빙은 어떤 것일까?”, “건강해서 오래 산다면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또한 우리사회의 웰빙 담론은 흔히 개인 인체의 건강에 초점을 맞추고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하면, 인간은 크고 작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에 개인의 웰빙은 사회의 웰빙과 밀접하다. 사회가 건강하지 않으면 개인이 건강할 수가 없다.
또 있다. 인간이 사회에서 살지만 여전히 자연의 한 부분이기에 우리를 둘러싼 지구환경이 건강하지 못하면 우리의 웰빙도 있을 수 없다. 물이 오염되어 마실 수가 없고 물고기는 기형적으로 변하고, 땅이 오염되어 먹을거리가 마땅치 않다면, 공해 때문에 공기조차 호흡할 수 없다면 우리의 웰빙은 유보될 수밖에 없다. “나는 사회가 어떻든 관심이 없고 골프장이 생태계를 파괴하더라도 알 바 없다, 나는 내 일만 한다”라는 항변은 누구에게나 직무유기이다.
‘너무 많이 얻어서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는 웰빙담론이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 ‘나는 알 바 없다’가 아니라 ‘함께 알아보자’는 연대의식이 싹터야 한다. 그리하여 진정한 의미의 참살이가 자리 잡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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