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원자력연구소 홍보협력과 한봉오 과장 |
홍보업무를 10여년 맡다보면 누구에게나 잊혀지지 않는 사건과 홍보에 얽힌 이야기 한두건은 있게 마련이다. 한국원자력연구소 홍보협력과 한봉오 과장의 기억속에 남겨진 빛바랜 이야기를 더듬어 보았다.
1990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추진 안면도 현지 반발 거세 ‘전쟁터 방불’
대전 車면 타이어 펑크내기 일쑤 신변위협에 숙박 여관도 숨길 정도
원자력 안전성 홍보 막막하기만…
2004년 IAEA 핵사찰 전세계 주목 기자들 질문공세에 ‘예, 아니오’만…
“제가 1989년부터 이곳에서 홍보업무를 맡았는데 1년도 채 안돼서 ‘안면도 소요사태’라는 엄청난 사건이 터져 얼마나 난감했는지 모릅니다. 그때 당시는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일 처리를 했는지…”
한국원자력연구소 홍보협력과에서 17년째 홍보업무를 맡고 있는 한봉오(45) 과장. 한 과장은 대덕연구단지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원자력연구소에서 홍보업무를 담당하다보니 반(半) 박사, 기자가 다 됐다.
연구소 박사들의 경우 자신들의 분야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해박한 전문지식을 갖고 있지만 분야를 조금만 벗어나도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한 과장은 각 분야에서 쏟아지는 자료를 취합해 홍보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그 분야의 지식을 습득하게 되고 또 기자들을 상대로 어느 정도는 설명을 해야하기 때문에 웬만한 전문가 못지 않은 지식을 갖고 있다. 또 많은 기자들을 상대하다보니 출입처를 옮긴 기자나 신참 기자들에게는 연구소에 대한 취재방법 등 ‘중요한 조언’(?)도 해주는 선배기자 같은 역할도 가능할 정도다.
이처럼 많은 경험으로 다져진 한 과장은 홍보업무에 관한한 대덕연구단지 내에서도 ‘베테랑’으로 통하지만 ‘병아리’ 시절에는 어렵고 힘든 일도 많았다. 특히 1년도 채 안된 1990년에 터진 ‘안면도 소요사태’는 그에게 있어 많은 경험을 가져다 주었으며 지금의 자리에 설 수 있게 한 일대 사건이었다.
▲안면도 소요사태= 1990년 6월 정부에서는 태안군 안면도에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처분장’ 시설 건립을 추진했었다. 초창기 안면도 주민들은 이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원자력연구소 직원들은 지역민과 언론에 적극적인 홍보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9월 중순부터 환경단체 등이 반핵시위를 벌이면서 반발이 시작되자 안면도 주민들도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며 극심한 갈등이 시작됐다. 시설 건립의 찬성측과 반대측 주민들간에 애경사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물론 심지어 의견이 다른 주민의 가게에서는 껌 한통도 사지 않을 정도로 반목의 골이 심하게 패어갔다.
한 과장은 “당시 원자력폐기물이 안전하다는 것에 대한 홍보활동을 하러 안면도에 갔을 때 승용차가 대전 번호판일 경우 타이어 펑크는 물론 신변에 위협을 느껴 여관 객실도 위장해서 잠을 잘 정도였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한 과장은 또 “일부 언론에서는 우리가 설명을 하면 안전하다는 것에 대한 수긍을 하면서도 ‘세계에서 유례없는 천층처분방식’ 등 유해한 쪽으로 기사화돼 어려움이 많았다”며 “정치적인 논리도 작용돼 소요사태가 상당히 격앙됐었다”고 털어놨다.
그때 당시 학생들 마저 수업을 거부하고, 안면도 지서가 불타고, 경찰 공무원이 인질로 잡히기까지 하는 등 안면도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전쟁터를 방불케할 정도였으니 그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그해 12월 열린 국정감사에서 야당 의원들의 끈질긴 자료요구에 ‘연구소 분소 입지방안과 대상부지 예비평가’의 내부 기밀문건이 불거져 나오고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서는 비밀발설자 색출작업을 벌이는 등 엄청난 파장이 일었었다. 이후 이 계획은 전면 백지화되고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처분장’ 시설 건립에 반대했던 1만여명의 안면도 주민들은 격앙됐던 민심을 가라앉혔다.
한 과장은 “당시 사태의 진압은 불가항력적이었다”며 “시대상도 군사정권에서 민주화로 넘어가는 시기인데다 정치 논리적으로 밀려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 지난 2004년 한국원자력연구소 내 일부 과학자들이 2000년 초 10% 농도의 우라늄 0.2g을 분리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 핵실험 파문으로 인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게 됐다.
이 때 일본의 호소다 히로유키 관방장관은 “IAEA는 미량의 핵 물질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일본 정부는 ‘한국 핵문제’를 러시아 인질극이나 이라크 사태에 못지않은 큰 사건으로 비유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더욱이 관방장관, 외상, 방위청 장관 등이 나서 “6자회담에 미칠 영향이 걱정”이라며 IAEA에 철저한 사찰을 촉구했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도 “한국은 사실관계를 밝히고 IAEA와 잘 협의해야 한다”고 거들면서 악의적 보도에 초점을 맞췄다.
이 문제는 연구소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인 문제였고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을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다.
당시 세간에 떠도는 소문은 미국에서 한국이 우라늄 농축 등 핵과 관련된 실험을 한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어 이를 찾기 위해 고의로 루머를 흘린 뒤 IAEA로부터 사찰을 받게 했다는 것이다.
한 과장도 이같은 소문을 접했지만 뭐라 입장을 밝힐 처지도 못됐을 뿐 더러 개인적인 사견 조차도 철저하게 함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워낙 민감한 사안이어서 자칫 이야기가 와전돼 언론 등에 보도될 경우 그 파장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IAEA 사찰단이 국내에 입국해 사찰이 진행될 무렵이었다. IAEA 규정상 사찰단의 입국부터 사찰 일정 등은 철저한 보안유지 속에 이뤄지기 때문에 이들의 행보에 모든 관심이 쏠렸다. 당연히 기자들은 취재를 해야하고 한 과장은 입을 열어서는 안될 처지에 있었다.
한 과장은 “당시 기자들이 IAEA 사찰단이 입국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몇 명이, 누가 입국했는지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규정상 내 입으로 말하면 안됐기 때문에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며 상황을 피해간 적이 있었다”며 미소를 지었다.
한 과장은 또 “홍보업무를 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거짓말도 하게 되고 웃지 못할 일도 종종 겪는다”며 “홍보라는 것이 단순한 홍보가 아니고 연구소 내의 각종 행사 수행과 기고문 작성 등 잡무가 엄청나게 많다”고 어려움도 털어놨다. 한 과장은 이어 “이제는 홍보업무가 전문화돼가는 추세여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어렵고 딱딱하기만한 과학에 대해 국민들의 인식을 바꾸고 쉽게 전달하는 ‘전달자’ 역할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 1990년 안면도 소요상태 당시 안면도 핵폐기물처리장설치반대투쟁위원회가 안면읍사무소 회의실에 대책위상황실을 설치하고 정문을 봉쇄한채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
▲ 2004년 9월 한국원자력연구소를 방문한 IAEA2차 사찰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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