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소카와 前일본총리(사진 왼쪽)가 非자민당을 지향하는 신진당을 출범시킬 당시 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이 배후에서 많은 훈수를 두는 각별한 사이였다. |
백제민 정착지 규슈의 토박이 명문출신
93년 ‘백제계 조상설’에 韓日 언론 촉각
몇차례 취재에도 우회적 답변으로 일관
“개혁성향 祖父 고노에총리의 뜻 받든다”
日 정계개편의 도화선인 신진당 만들어
이인구 계룡건설회장이 막후 훈수 ‘눈길’
호소카와(細川護熙) 총리가 등장한 건 지난 93년의 일이었다. 그때 어느 신문에는 ‘그의 조상이 백제계통일지 모른다’는 토막 기사가 실렸다. 일본총리의 혈통과 족보에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1993년 가을, 그 무렵 일본의 유력 시사종합지 ‘문예춘추’, ‘중앙공론’에선 ‘호소카와 가문의 6백년 생존전략’을 비롯 그의 혈통에 관한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특히 한국 언론에선 그의 가문이 ‘백제 유적’이 많은 규슈(九州) 태생이라 해서 ‘백제계 조상설’을 흘렸다. 규슈의 다이묘(영주)였던 호소카와 유사이의 18대 손인 그는 조부가 총리를 두 차례나 지낸 보기 드문 명문후예다. 70년대부터 일본취재에 나섰던 필자로선 그의 친가, 외가의 가계를 분석, 그의 가문과 백제와의 관계를 추적한 일이 있다. 아울러 다양한 재능으로 일본 국민들로부터 박수를 받아 온 호소카와 총리부인 가요코(佳代子)의 숨겨진 비화를 중앙 월간잡지에 소개한 적도 있다.
자신의 姓과 같은 대전 細川방문
80년대 초반 호소카와(細川護熙) 구마모토 지사가 대전을 방문한 일이 있다. 당시 유흥수 충남도지사(전 민자당 의원)의 초청에 의해서였다. 그 때 이인구(전 국회의원)씨가 그를 ‘세천(細川)’으로 안내했다. 세천은 대전근교 터널이 있는 조그만 마을이다. 그의 성(姓)과 마을 이름이 같으니 예로부터 어떤 ‘인연’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때 호소카와는 마을을 바라보며 “어떤 맥락이 있을는지 모르겠다”며 그냥 웃어 넘겼다. 그가 총리로 등극하자 당시 어느 신문에서 그의 조상이 백제계일지 모른다는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호소카와의 등극은 거의 ‘신화’에 가깝다. 최소 6, 7선은 돼야 대신(장관) 감투하나 얻어 쓰기 어려운 판에 참의원 두 번과 현 지사 2기의 경력만으로 일약 총리가 됐으니 말이다. 또 일본에선 참의원을 아마추어로 간주, 중의원이야 프로로 쳐주는 판에 중의원 경력 없이 총리에 올랐으니 세계의 눈이 그에게 쏠리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면 그의 조상은 과연 백제계일까? 잘라 말하면 ‘일단 유보’였다. 호소카와 조상이 백제계라는 가설은 다음과 같은 맥락에 연유한다. 첫째, 그의 가문이 규슈(九州) 토박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그의 조상은 도쿠가와 막부 시절 규슈를 호령하던 호소카와 영주(大名)였다. 규슈하면 백제 유민들이 줄곧 정착했던 곳이다. 다사이후(太宰府)라든가 기쿠치 성, 미야자키(宮崎)에서 백제왕이 은거했다는 사실은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아스카(奈良)와 교토(京都) 지방이 백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지만 이들 지방은 백제, 고구려, 신라계가 번갈아 패권다툼을 했던 곳이어서 분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규슈 지방에서 ‘백제’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둘째, 일본의 명문가는 ‘도래계(渡來系, 바다건너 온 사람)’가 주류를 이룬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러면 호소카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일본인들은 “나는 도래계다”라고 말하는 이가 거의 없다. ‘조상이 그쪽에서 건너왔을지 모른다’ 정도로 모호한 표정을 짓는 게 보통이다. 호소카와도 마찬가지였다. 필자는 83년 충남도-구마모토 현 자매결연 당시 호소카와 지사 단독인터뷰에서 이와 같은 질문을 던져 보았지만 시원스런 대답을 얻지 못했다. 이후 세미나와 연회 등 공식석상에서 몇 차례 같은 질문을 던져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는 “4~5세기 경 도래인의 힘을 빌려 일본을 건국할 수 있었다”는 식의 우회적인 수사로 일관했다. 말하자면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식이었다.
따라서 그 자신이 명쾌하게 말하지 않는 이상 그의 조상이 백제계인지 아닌지는 가문을 추적, ‘유추’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도 한정된 범위 내에서 가능한 일이다. 우선 우리가 백제계로 지목하는 후지와라노 가마다리(藤原の鎌足·KBS TV에서 방영한 드라마 ‘삼국기’에 등장)의 가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일본의 천황 덴지(天智)를 ‘섭정’한 것으로 알려진 후지와라노 가마다리 혈통은 고노에(近衛)가로 이어진다.
여기서 고노에 가문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도표 참조)
조선친선 강조한 유사이의 18대손
후지와라노 가문은 고노에(近衛基通)로 이어져 저 유명한 후미마로(文磨)에 이른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고노에와 호소카와 양가문의 관계다. 호소카와 가문의 개조(開祖)는 유사이(幽齊)라는 인물이다. 그는 도쿠가와(德川家康)의 왼팔 노릇을 했기 때문에 히고(肥後)의 영주로, 명치유신 때까지 대대로 ‘히고’를 호령했다. 호소카와 총리는 ‘유사이’의 18대 손이다.
유사이는 도쿠가와에게 조선과의 친선을 강하게 권유했던 인물로도 유명하다. 임진왜란 후의 일이다. 그 바람에 조선통신사도 건너가게 됐고 양국은 국교정상화를 이룬다. 그러니 후손 호소카와 총리가 구마모토 지사 재직시 충남도와 자매결연을 하고 폭넓은 교류를 펼쳤다는 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러면 ‘후지와라노 가마다리’ 가문과 고노에와 호소카와 총리는 어떻게 되는가. 알려진 대로 ‘고노에 후미마로’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총리로 호소카와에겐 외할아버지가 된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 고노에가 호소카와의 외조부뿐만 아니라 조부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일본 매스컴에서도 외조부, 조부, 증조부 등 편할대로 불러대고 있다. 도대체 어느 쪽이 정답인가. 여기에는 그럴만한 내력이 있다. 일본에서는 외조부도 조부라 부르는 경우가 왕왕 있으며 도표에서 보듯이 호소카와 모친(溫子)은 고노에 후미마로의 딸이다. 그러니 외조부 또는 조부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 증조부 소리는 왜 나오는가. 고노에 후미마로는 호소카와 어머니(溫子)외에 아들 후미모리(文隆)를 두었다. 그는 육군 소위 출신이다.
그런데 그에게 아들이 없어 호소카와 집안에서 양자 한 명(忠輝)을 데려간다. 그 양자는 호소카와 총리보다 한 대(代) 위다. 따라서 양자 쪽으로 본다면 조부가 된다. 고노에는 내각을 두 번이나 주름잡았던 총리 출신이다. 우리가 백제계로 지목하는 후지와라노 가마다리 혈통을 이어받은 그는 황실을 감싸며 최우익(右翼)에 섰던 원로 사이온지고(西園寺公望)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고노에는 교토(京都)대학 재학시절 이미 귀족원에 의석을 둔 공작(公爵)으로 나중엔 중추참의원 의장직까지 지냈다. 그럼에도 늘 개혁의지를 품어 왔다는 건 호소카와 총리와 일맥상통하는 점이라 하겠다.
구마모토 지사때 충남도와 교류확대
70세 이상의 일본 전전(戰前)파들은 호소카와 총리가 어쩌면 그렇게 고노에를 닮았느냐고 감탄한다. 속된 말로 ‘외탁’을 한 것이다. 얼굴만 닮은 게 아니라 정치수법까지 유사하다는 평들이 무성했다. 귀족출신임에도 개혁성향까지 닮았다는 것이다. 이는 혈통뿐 아니라 고노에의 유지(遺志)를 받은 탓이라 보아진다. 태평양 전쟁이 패전으로 끝나자 고노에는 자결을 했다. 맥아더 사령부에 끌려가 수모를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 쪽을 택한 셈이었다. 권총 자살을 하려다 미수에 그친 도조(東條)보다 훌륭한 인물로 꼽히는 이유가 이런데 있다. 그는 생전에 호소카와를 무척 귀여워했다. 무릎에 앉혀 놓고 “장차 훌륭한 정치가가 돼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고 전한다.
조오지(上智)대 법학과를 졸업한 호소카와는 아사히신문 가고시마(鹿兒島) 주재기자를 했다. 그가 쓴 ‘향토문학 나들이(旅)’는 많은 독자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그 후 본사 근무 중 돌연 자취를 감추더니 20대에 중의원 출마를 했다. 여기서 그는 고배를 마셨다. 그 후 32세 때 참의원에 당선, 재선 후 구마모토 현 지사에 당선된다. 지사도 두 번을 거쳤다. 당에선 세 번째 공천을 하려 했으나 그는 손을 내저었다. “물은 흐르는 법이다. 한자리에 오래 머물면 정체하거나 썩기 마련이다”는 말을 남기고 동경으로 훌훌 떠났다.
이후 그는 ‘행정개혁 회장’ 자리를 맡는다. 하지만 원로정치, 금맥정치가 판을 치는 곳에서 그의 입김이 먹히질 않았다. 미야자와(宮澤) 총리에게 직언도 많이 했고 불평 깨나 늘어놓았다고 한다. “총리는 형편없는 사람이다. 행정개혁심의 보고를 해도 진지하게 듣는 법이 없다. 그저 듣는 척할 뿐이다. 개선책을 말해도 성의 있는 자세를 보이질 않는다.”
그는 자민당을 뛰쳐나와 신당을 만들었다. 혼자였다. 신진당(新進黨)이 바로 그것이다. 그때 막후에서 훈수를 둔 인사가 한국에도 있다. 그가 구마모토 지사시절부터 교분을 지녀온 이인구(李麟求·전의원·계룡건설 명예회장)씨를 찾은 것이다. 그때 이회장은 현역시절이다. 선배의 지혜 좀 빌리자며 깎듯이 고개를 숙이는 통에 도쿄에 들렀다고 했다. 처음엔 이래가지고 될 것인가? 얼마간 회의에 젖더라고 이회장은 당시를 회고한다.
조그마한 사무실에 소파라야 10여명이 앉으면 꽉 찰 그런 규모였다. 칸막이를 한 옆방에선 여직원이 계속 컴퓨터를 두드릴 뿐 내왕객도 별로 눈에 띄질 않더라는 것이다. 자금도 모자라는 눈치였다. 몇 억 엔을 은행에서 빌렸다는 것인데 장차 대권을 넘보는 정치인이 이 정도의 준비로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인지 안타깝더라고 이회장은 당시 일을 설명했다. 이회장은 이런저런 전략(술수)을 귀띔해 줬다는 것이다. 어떻든 호소카와는 해냈다.
참의원 선거에서 6석을 건졌고, 총선에서 36석을 얻어냈다. 그리고는 하타(羽田), 오자와(小澤)파와 연립정권을 창출하기에 이른다. 그가 혼자 신당을 꾸릴 때는 정치부패 척결, 정경유착 단절, 세법개정, 정치제도 개정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 ‘고노에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든다’라는 점이다. 창당구호에 이 구절이 들어 있다. 사사로운 가훈을 내건 듯한 인상이지만 한 집안에서 두 사람의 총리를 배출한 것이다. 호소카와는 외유내강 형이면서도 틀이 큰 편이다. 개조(開祖)가 그러했듯 은인자중할 줄도 알고 또 ‘찬스’에 강하다는 공통점을 지녔다고 했다.
세간에선 그가 억만장자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조상 때는 54만석을 받아들인 영주였지만 패전 후 맥아더의 토지개혁을 맞아 이젠 토호도 영주도 아닌 가문으로 몰락한 셈이다. 아직도 요소에 부동산과 서화, 골동품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인 모양이다. 하지만 모두가 문화재와 가보여서 팔아먹을 수도 없다고 하니 재물이 곧 돈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前 중도일보 주필>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