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료나 물 양에 따라 맛도 달라져… 고생해 빚은 술도 버려야지 어떻게해…
일제때 밀주단속원도 이맛에 반해 많이 봐줬어… 안만들면 더 서운해 하고
고향의 맛 민속주 명인을 찾아서 계룡 백일주 지복남씨
# 380년 전통의 궁중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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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의 거사를 치른 연평 부원군 이귀(연안이씨·1557∼1633)의 손에는 인조가 하사한 선물이 들려있었다.
그 선물은 왕실 대대로 전해온 궁중술의 양조 비법.
인조는 왕실에서만 전해지던 궁중술의 양조비법을 연안이씨 가문에 하사해 부인인 인동 장씨를 통해 이어가도록 했다.
이때부터 이 술은 380년간 이씨가문의 며느리를 통해 오늘에까지 이어진다.
며느리에서 며느리를 통해 ‘가문의 술’로 전수됐기 때문에 술을 빚는 방법은 문헌에도 기록돼있지 않다.
지금도 연안 이씨 며느리인 지복남(82)씨에 의해 술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이 술이 바로 ‘계룡 백일주’.
술이 완성되기 까지 100일이 걸린다고 해 백일주라고 하고, 충남의 명산 계룡산 정기로 빚어진다고 해 심대평 도지사가 계룡이라는 ‘호’를 붙여줬다.
백일주는 마시면 신선이 된 것 같다고 해 ‘신선주’라는 별칭으로 늘 귀한 대접을 받아왔다.
연안 이씨 가문은 술을 대량 생산하지 않았다. 조금씩 만들어 제사를 모시는 수준에 그쳤지만, 역대 조선왕부터 현재의 노무현 대통령까지 백일주는 ‘궁중술’로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 60년 장인의 손맛
24세의 나이로 연안 이씨 가문에 시집온 지복남 할머니는 80이 넘은 지금까지 백일주의 맛을 지켜오고 있다.
지씨는 시집온 해 1년간 예절을 배우며 마음가짐을 닦았다. 3년 뒤인 27살 때 원종갓집의 종부로부터 백일주 비법을 전수받기 시작했다.
“절이 얼마나 어려운줄 알아? 제대로 절하는데 만 꼬박 1년이 걸렸어.”
연안 이씨 이귀의 14대 손인 이 횡(86)씨의 부인으로 시집와 백일주의 장인이 되기까지는 인고의 세월이었다.
찹쌀 죽 외에는 물이 단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고 술을 우려내다보니, 재래종 솔잎, 재래종 국화꽃, 진달래꽃, 오미자 등 정확한 배합으로 꼬박 100일을 기다려 술을 만들었다.
손수 재료를 준비하다보니 지씨는 일년 내내 산과 들을 헤치며 술에 들어갈 재료를 채취해야했고, 물은 14대째 살아오는 공주시 이씨 종가의 샘물을 사용해야했다.
재료나 물의 양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정
“말도 마. 여름내 뙤약볕에서 뜨거운 불 앞에서 술을 내렸는데 전부 쉬어서 버리면 얼마나 속상한데. 혼자 울기도 많이 울고….”
고생해 빚은 술이라도 지씨는 제대로 된 술맛이 나오지 않으면 술을 그대로 버렸다. 재료의 아까움보다 380년 전통의 술맛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 시련과 함께한 명주
1907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주세법이 공포되면서 우리의 민속주는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밀주를 막는다며 주류단속을 강화하면서 전통주는 몰살위기에 놓이게 된다.
해방이후 전통주가 활기를 찾는 듯 했지만 1946년 이후 곡식을 원료로 한 술의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이런 혼란과 시련 속에서도 명맥을 확실하게 유지해 온 술이 백일주다.
지복남 명인은 “단속을 다니던 공무원들이 우리집 술맛에 반해서 많이 봐줬어. 밀주단속 때도 꿋꿋이 술을 만들었지. 오히려 안 만들면 더 서운해 하고….”
온몸으로 백일주의 맛을 지켜낸 지복남 명인은 1989년 충남도로부터 무형문화재 7호로, 94년에 농림수산부로부터 전통식품 명인 제4호로 각각 지정받았다.
백일주는 지난 2001년에 한국관광공사로부터‘한국관광명품’으로, 올 1월에는 청와대의 선물용 상품으로 각각 선정됐다.
우리농림수산식품 품평회에서는 민속주 부문 대상을 차지하는 등 계룡 백일주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명주로 자리 잡는다.
현재는 아들 이성우(45)씨와 며느리들이 맥을 이어가고 있다. 셋째와 넷째 며느리는 시어머니로부터 백일주 비법을 익히느라 여념이 없다.
# 백일주는 자연의 맛
백일주의 재료인 솔잎이나, 국화꽃 등은 맛을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구하기 쉬운 수입산보다 계룡산에서 직접 채취한 재래종만을 고집한다.
백일주에 사용되는 누룩은 찹쌀가루를 사용해 만든다. 통밀과 찹쌀을 똑같은 분량으로 섞어 거칠게 빻은 뒤 물과 섞어 반죽을 한다.
누룩 틀에 담아 띄우는 기간은 여름철 2개월, 겨울철 3개월이며, 2∼3일에 한번씩 뒤집어준다.
계룡 백일주는 밑술이 발효되는 시간이 30일, 본술을 빚은날부터 술이 다익을 때까지 70일이 걸린다. 본술을 빚을 때 국화꽃, 진달래꽃, 솔잎, 오미자 등 온갖 재료를 넣는다.
백일주는 창호지를 이용해 걸러낸 후 최종 완성된다.
백일주는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16도짜리 ‘약주’와 30도짜리 ‘소주’다.
약주는 저온에서 장기간 발효 숙성시켜 만든 것으로 향긋한 향취와 부드럽게 넘어가는 맛이 ‘예술’이다. 냉장보관해서 차게 마시면 더욱 맛이 좋다.
소주는 약주를 증류시킨 뒤 벌꿀을 넣어 만든다. 이 소주를 옛날에는 백일소주라고 불렀다.
독한 편이지만 솔잎과 국화꽃 등의 은은한 향이 있어 부드럽고 담백하기까지 하다.
많이 마셔도 숙취가 적은 것이 매력. 백일소주는 오래될수록 맛과 향이 더욱 좋아진다.
왕실 대대로 전해온 궁중술 양조비법 전수
연안 이씨 며느리들 통해 380년간 이어져
한국관광명품·민속주 대상 名酒 자리매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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