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인 충남대 교수 |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의 특징이 일사불란함이나 획일성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프랑스만큼 ‘다름’과 ‘차이’를 인정해주는 나라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프랑스는 다양성의 문화를 꽃피웠다. 켈트와 라틴, 게르만 그리고 아랍이라는 인종적 다양성에다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교차로라는 지역적 다양성이 더해져 프랑스는 고대로부터 살아 숨쉬는 다양한 문화와 예술, 철학의 전통을 발전시켜 왔다.
중앙 집중화와 다양성은 프랑스 사회와 문화를 지탱하는 구심력이면서 동시에 원심력이다. 여기에 프랑스는 작은이들 혹은 작은 것들(쁘띠 petits)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용(톨레랑스)의 정신이라는 무늬를 아로새겼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세계 최고의 개성적 문화, 독창적 문화의 보고이면서 산실이 되었다.
반면 21세기 대한민국은 여전히 사회의 모든 층위에서 중앙 집중과 획일성이 창궐하고 일사불란을 강요하는 모습이다. 인구의 절반이 이른바 수도권이라는 서울·경기에 모여 살고 정치와 경제, 문화의 모든 것이 거기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하여 수도권의 과잉집중은 이미 포화를 넘어섰고 머지않아 대폭발이 예견되는 가운데 우리에게는 지방화와 분권화라는 당위가 대두되었다. 그러나 중앙 집중과 획일성의 틀에 갇힌 사람들은 지역균등발전과 ‘나눔’이 무슨 대재앙이라도 되는 듯 저항하고 있다.
특히 여론을 창출하고 이끌어야 할 언론이 이러한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폐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것은 적지 않은 문제를 재생산한다. 지역 언론 혹은 지방신문을 생각할 때마다 지역 대학 혹은 지방대학이 떠오르는 것은 필자가 학교에 몸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지방신문과 지방대학은 적어도 ‘서울집중과 지방소외’ 그리고 거대 자본의 ‘싹쓸이’라는 우리 사회의 광기에 치여 존폐의 위기를 겪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궤에 놓여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글을 깨우치는 순간부터 아니 말을 배우는 순간부터 서울중심을 향한 지난한 물살 속에 내몰린다. 획일적이고, 거칠고, 비인간적인 경쟁의 탁류에서 맹목적인 수도권 생존 지향의 훈련을 받는다. 서울중심의 신문방송을 보고 듣고 수도권 중심의 드라마에 공감하며 자란다. 수도권 대학에 들어가기 위하여 십 수 년 동안 과외를 하고 수도권에 머물고자 학원에 다니고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온다. 여기에서 ‘나대로’라든지 ‘다양함’이라는 단어는 낯설다. 수도권의 거대 언론과 교육기관은 이를 조장 혹은 적어도 방기한다.
물론 지역 언론과 지역 대학의 모든 문제가 외부에서 온 것만은 아닐 것이다. 지역 언론은 지역 언론대로 지역 대학은 지역 대학대로 자기만의 고유한 목소리와 역량을 키우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어디에 내놓아도 당당한 경쟁력도 키우지 못했고 독특한 색깔을 띠지도 못했다. 원인이야 여러 가지를 찾을 수 있겠으나 아무튼 복제품 혹은 모조품 생산에 만족하며 게으른 세월을 보냈던 것은 아닌가 반성할 때다.
오늘 중도일보 창간 54주년을 맞이하여 지역민 모두와 축하의 인사를 나누면서 ‘지방’과 ‘작은 것’도 존중되며 그리하여 다양한 가치가 평가되는 미래를 위하여 중도일보가 큰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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