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상희 언론인·목요언론인클럽 회원 |
임진왜란으로 우리 산하는 피범벅 쑥대밭이 되었고 거리엔 거지와 도둑과 불한당이 들끓었다. 그로부터 100년 후 영조시대(16세기말)의 모습이 이익이 한탄한 그 시대였다. 100년 전의 비극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무기고를 엄정하게 관리하고 병사들을 제대로 확보하여 조련시키고 사기를 고양시켜야하는데도 관청은 썩어 문드러져 백성들의 등골을 빼먹고 군기(軍紀)는 무너졌다. 난리 나면 활시위는 관아로 향하게 마련이다.
정약용은 유배생활 18년 간 끔찍한 부정부패를 목격한다. 한 농민이 전 재산인 소를 군역세(軍役稅)라 하여 빼앗긴다. 3년 전 죽은 애비와 생후 1개월의 새끼까지 군적에 올라있다. 관청에서는 애비와 새끼가 군역을 치르지 않았다며 대신 소를 빼앗은 것이다.
농민은 낫으로 그것을 베어 관청 앞마당에 던진다. 농민은 그것 때문에 소를 빼앗겼다고 울부짖으나 귀 기울이는 사람도 없다. 정약용은 그것을 보고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를 지었다.
“시아버지 죽어 상복 입었고/ 갓난아이는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3대의 군적이 실리다니/ 남편 문득 칼을 갈아 방안으로 뛰어든다/ 붉은 피가 낭자하구나/ 스스로 탄식하네/ 아이 낳은 죄로구나”
정약용은 “제도가 바로 서지 못하면 바로 섰던 제도도 흐트러진다. 오호라, 제도가 바로 선 적이 있던가”라고 한탄한다. 시쳇말로 하면 시스템 행정이 제대로 되지 않고 코드 행정이 설치고 있다고나 할까.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칼에는 삼척서천(三尺誓天) 산하동색(山河同色) 일휘소탕(一揮掃蕩) 혈염산하(血染山河)라, 즉 석자의 칼로 한번 휘두르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는 뜻이 각인되어 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한 처절한 마음의 표현이련만 그로부터 100년 후 영조 때에는 이순신 정신의 흔적마저 찾아 볼 수 없었으니 과연 역사는 왜 기록되는 것인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을 시기하던 선조의 꼴을 보면 나라는 이미 그때부터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6·25가 지난 지 50여 년, 우리의 형편은 어떤가. 일촉즉발의 위기가 눈앞에 이르렀으나 모두 침묵한다. 이른바 여론선도층이라는 창백한 지식인들은 보수와 진보라는 그 남루한 의식의 두루마기를 걸친 채 드잡이를 하고 있다. 관료들은 제멋대로 나랏돈을 훔치고 국회의원들은 허접스런 화두에 놀라 억지 춘향의 논쟁으로 날을 지샌다.
이순신은 노량해전을 앞두고 왜 어명을 거역했을까. 당시 선비들은 대의와 도리에 어긋나는 어명을 순종하지 않는 것이 충성이며 충성해야할 대상이 백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불멸의 이순신은 오늘에도 불멸의 교훈으로 널리 회자되고 있다. 특히 선조와 당시의 한심한 조정의 간신 무리 같은 추악한 지도자가 있는지 없는지 두 눈 부릅뜨고 살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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