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맹창호 기자 |
하지만 당시 임정의 상황은 ‘환희’보다는 ‘안타까움’의 심정이 더 했다는 게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임정주석이던 백범 김구 선생은 “왜적의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고 백범일지에 적었다. 당시 광복군이 미군 잠수함을 이용해 본토 상륙작전 직전에 이뤄진 해방은 민족의 염원이었지만 ‘전후처리 과정의 국제관계에 발언권이 박약해 질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 비서 선우진(84)씨도 최근 한 신문과 인터뷰에서 “일본의 항복소식을 듣고 우리는 반갑기보다는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고 당시 임정의 침울한 분위기를 전했다. 광복군 제2지대 장교였던 장준하 역시 ‘돌베개’에서 “적지였던 조국으로 잠입하던 계획의 실패도 안타까웠지만 (해방 이후)미군사절단 편에 진입하려던 계획의 차질은 더욱 큰 실망을 주었다”고 했다. 우리에게 8·15 해방은 ‘기쁨’과 ‘환희’로만 그 의미가 새겨져 있지만 그 해방은 자주적이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고, 특히 당시 임시정부는 이 점 때문에 기쁨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부와 독립기념관이 중경에서 경축행사를 갖는 것 자체를 시비할 바는 아니지만 충칭 현지에까지 가서 하는 행사에는 광복의 이런 이면(裏面)도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 분단으로 아직 완전한 광복을 이루지 못한 우리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는 것도 좋았을 것이다.
독립기념관의 한 연구원은 이번 행사를 두고 “‘광복=환희’라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당시 상황을 국민에게 명확히 알리는 것이 좀 더 큰 의의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번 새겨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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