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춘추] 세월 속에 묻혀버린 시창(詩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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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춘추] 세월 속에 묻혀버린 시창(詩唱)

  • 승인 2005-08-12 00:00
  • 이승재 국악 칼럼니스트이승재 국악 칼럼니스트
▲ 이승재 국악 칼럼니스트
▲ 이승재 국악 칼럼니스트
판소리 ‘춘향가’의 막바지 무렵, 암행어사 이몽룡이 남루한 행색으로 신관 사또 잔치에 끼어듭니다. 무능하고 부패하기가 짝이 없는 지방 수령들과 이리저리 뼈 있는 말들을 주고받다가, 거지꼴의 어사또가 붓을 들어 시 한 수를 적어 내려갑니다. “금준미주천인혈(金樽美酒千人血)/ 옥반가효만성고(玉盤佳肴萬姓膏)/ 촉루낙시민루낙(燭淚落時民淚落)/ 가성고처원성고(歌聲高處怨聲高)” (금으로 만든 술동이의 좋은 술은 백성의 피요/ 옥으로 만든 소반 위의 맛있는 안주는 백성의 기름이라/ 촛농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도 한없이 떨어지며/ 노래 소리 높을 때 백성의 원망 소리 또한 높구나.) 잠시 후, “암행어사 출두(出頭)요오.” 청중들은 상기된 얼굴로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한마디씩 거듭니다. “그것 참 잘 되었다.” “못된 놈들 혼 좀 나봐라.” 이제부터 이야기는 순풍에 돛 단 듯, 춘풍에 꽃 피 듯 해피엔딩으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소리꾼은 색다른 가락으로 어사또의 한시를 읊어댑니다. 그것은 ‘시창(詩唱)’이라는 가락으로, 대개 칠언(七言)으로 된 한시를 독특한 선율에 얹어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시창하면 으레 영조때 문인 신광수(申光洙)의 과시(科詩)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歎關山戎馬’를 독특한 시김새를 섞어 읊는 서도소리를 떠올립니다. 보통은 줄여서 ‘관산융마’라고 부릅니다. 이 시의 제목 속에 보이는 ‘등악양루’는 당나라 시인 두보가 악양루에 올라 동정호를 굽어보며 어지러운 세태를 읊은 절창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한시를 일컫습니다. ‘등악양루’의 말련(末聯)에 “융마관산북(戎馬關山北)/ 빙헌체사류(憑軒涕泗流)” (북쪽에는 아직도 전쟁 중이라니/ 난간에 기대어 세상을 생각하며 눈물만 흘리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이는 표현인 ‘관산융마’의 이미지를 가지고, 두보에 정통한 신광수는 ‘등악양루’의 시상을 화려하고 새롭게 전개합니다. 놀라운 시재입니다.

전통가곡의 명인 김월하(金月荷), 그녀는 유려한 목소리로 또 다른 두 개의 한시를 서로 다른 가락으로 읊었습니다. 하나는 고종 때 삼척부사 심영경(沈英慶)이 경포호에 비친 봄을 유유자적하는 선객의 눈으로 묘사한 ‘십이난간(十二欄干)’으로 시작하는 칠언율시 ‘강릉경포대 江陵鏡浦臺’이며, 속세를 떠나 자연하고 벗하고 사는 은일사의 삶을 표현한 ‘십재경영(十載經營)’으로 시작하는 작자미상의 칠언율시 ‘별업別業’이 다른 하나입니다. 예전에는 항다반사였던 ‘한시 지어 가락에 얹어 읊던’ 풍류가 지금은 화석화된 몇 개의 가락으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무심한 세월은 그렇게 귀중한 것들을 어떻게 하나도 아까워하지 않고 말끔히 지워버릴 수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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