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 부장 선생님께서 처음 이 모임을 제안했을 때 시큰둥했다. 그 이유는 우리 학교가 도서관 활성화 사업 지원 대상 학교로 선정되어 도서실을 리모델링하게 되었는데 담당자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보나마나 정신없이 바쁜 일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겠구나 싶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새 나는 그 공모제에 꼭 필요한 핵심 인물이 되어 있었다. 우리 학년부장 선생님께서 회장이 된 그 공모제의 연구 주제는 바로 내가 쓴 논문 ‘문단 이론’을 바탕으로 추출하였고 이미 계획서도 낸 상태였다. 이 연구를 진행하려면 나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다.
한동안 나는 혼란함 속에서 갈팡질팡했다. 요즈음은 아이디어 경쟁사회라고 나또한 1년 넘게 연구한 내용을 여러 사람을 위하여 쉽게 쏟아내는게 억울했다. ‘지금이라도 바빠서 못한다고 말할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갈피를 잡지 못해 선생님들을 대하는 얼굴빛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학년 선생님들과 서먹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내가 학년 연구실에 가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간혹 가더라도 나를 제외한 선생님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선뜻 끼어들기가 곤란했다. 이런 나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학년 선생님들도 나를 어렵게 대하는 듯했다.
“임숙희, 계획서가 통과되었어.”
그나마 내가 살갑게 대했던 선생님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응, 잘됐네.”
“야, 임숙희 안 기뻐?”
“난 당연히 통과될 것이라 생각했지 떨어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한 적 없어서 그래.”
사실 이제까지 나는 ‘제발 계획서가 떨어졌으면 좋겠다’라고 빌었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당연히 꼭 붙지’하는 믿음이 깔려 있었다. 진실로 기쁘지 않았지만 한편으론 후련하기도 하였다. 계획서가 통과되었으니 학년 선생님들과 사이가 어찌됐든 나에게 도움을 청해올 것이고 나 또한 ‘나 몰라요’ 할 사람은 못된다.
그 동안의 값진 친분을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 사람을 잃으면 인생을 다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야’라는 말을 마음 속에 새기고 또 새기며 지금까지 그들을 불편하게 했던 나의 행동을 뒤늦게 꾸짖었다.
내 마음에 그들을 다시 담고 나니 학교 갈 맛이 났다. 나중에 부장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임숙희, 미안해, 우리가 거져 빼앗은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어.”
어쩜 그렇게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을까? 이렇게 좋은 사람을 왜 그렇게 불편하고 힘들게 하였을까? 내 마음의 보석 상자를 늦지 않게 다시 찾을 수 있어서 그래도 나는 현명했다. 그리고 정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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