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순택 논설위원 |
영화 ‘아일랜드’의 주인공은 복제인간이다. 장기를 제공하고 ‘폐기’당해야 할 복제인간이 자신의 원본인 고객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건 아니다. 과학적 당위성도 사실 없다. 원본을 찾아가는 복제인간과 그 뒤를 쫓는 용병들간에 벌이는 할리우드식 화려한 액션이 전부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우리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걸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의학적 용도로 사용될 스페어 제조기로서의 복제인간, 그다지 불가능하지도, 우리가 읽고 있는 신문기사와 영화가 만나는, 멀지 않은 우리의 미래를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어째 좀 이상하다. 황 교수는 지금 국민적 영웅이 돼있다. 민족적 자긍심을 높였고, 난치병 치료의 길을 활짝 열어놓았으니 뉘라서 고맙지 않을 건가. 나도 그중 한 사람이고, 사고로 전신마비나 하반신마비를 당한 척수장애인들이 다시 걸을 수 있다는 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다. 이런 환자들의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있다면 노벨 의학상뿐 아니라 평화상까지 더블로 줘도 모자랄 일 아닌가. 그런데 다른 한 쪽에선 황 교수의 연구가 초래할 부정적인 미래를 그린 영화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이상하지 않은가.
아마 그건 어떤 과학기술이건 확산과 통제 불가능하다는 메커니즘 때문일 것이다. 핵 기술을 보라. 미국이 아무리 독점하려 해도 핵 기술은 결국 여러 나라로 퍼져나가 인류의 공포가 돼버렸다. 복제기술도 같은 전철을 밟지 말란 법이 없다. 황 교수가 인간복제를 하지 않겠다고 아무리 강조해도-영장류인 원숭이 복제에는 도전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적절했다-그의 연구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누군가에 의해서건 언제든 인간복제가 시도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개 복제 성공 발표이후, 인터넷 상에서 다시 불붙고 있는 복제인간을 둘러싼 휴머니즘 논란도 그런 불안감의 표출일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런 논란은 계속돼야 하고 더욱 뜨거워져야 하고, 더욱 확산돼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생명과학,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성찰이 필요한 때다. ‘아일랜드’가 주는 메시지 하나, 사회적 토론과 성찰이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는 과학기술은 결코 지속될 수 없다는 거다.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인간복제, 키메라(이종 복제), 난자 밀매 등 앞으로 무수히 제기될 문제들에 대한 검증작업이 필요한 게 지금이다. 생명공학 분야의 선두에 서있다면 이런 기술을 적절히 통제할 만한 사상을 정립하고 제도적 장치를 병행하는 작업도 우리가 먼저 해나가야 할 몫이다. 역사학자 존 루이스 개디스가 말했듯 “미래는 예측되는 것이 아니고 대비(對備)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인간배아를 둘러싼 논란을 간추리면 배아줄기세포가 인간이냐 아니냐일 것이다. 인간이라면 그걸 이용해서 다른 사람을 치료하면 안 되지, 인간이 아니라면 그야 인간을 위해 얼마든지 이용해도 좋지, 라는 생각을 대부분 갖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인간들의 좀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이용해도 괜찮은 건가.
혹시 지구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고, 식물이나 동물들, 대지와 공기조차 인간들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믿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과연 타당한가. 그것부터 먼저 짚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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