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세평] 자연은 비계 덩어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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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세평] 자연은 비계 덩어리인가?

  • 승인 2005-08-04 00:00
  • 박찬인충남대 교수박찬인충남대 교수
프러시아 점령하의 프랑스 북부도시 루앙을 탈출하려는 마차가 있었다. 세 쌍의 명문귀족과
부자 상인, 놈팡이 공화주의자 한 명, 두 수녀, ‘비계 덩어리’라는 별명의 매춘부 한 명이
마차에 타고 있었다. 추운 겨울 이른 새벽 두려움과 공포로 모두가 위기를 느꼈다.
‘비계 덩어리’가 준비한 음식을 나누면서 마차 안의 분위기는 따뜻해진다. 그 누구도 말
을 걸려하지 않던 천한 여인에게 상인은 아양도 떤다. ‘비계 덩어리’는 마차 안의 승객들
을 추위와 허기에서 구해낼 뿐만 아니라, 섞일 수 없던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가능하게 만
든다.

그러나 마차는 중간기착지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모두가 여행허가증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지역 담당 장교가 ‘비계 덩어리’와 잠자리를 요구하면서 출발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
다. 자유를 찾아 탈주를 감행하는 프랑스의 선량한 시민 모두는, 처음에는 인간의 존엄성 운
운하며 적군 장교의 파렴치한 요구에 분노한다. 그들을 추위와 굶주림에서 구해낸 ‘비계
덩어리’의 단호한 거부 의사에 절대적인 지지도 보여준다.

시간이 흐르고 모두가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지면서 상황은 돌변한다. 모두 희생
의 미덕 운운하며 매춘부를 설득한다. 매춘부의 희생에 죄책감을 느낄 까닭이 없다고 생각
한다. 그러나 그녀의 저항은 완강하다. 급기야 ‘천한 것이 본분도 모르고 상대를 가린다’
는 비난이 쏟아진다. 자유를 갈망하는 그들을 묶어놓는 것은 프러시아 장교가 아니라 애당
초 동행할 자격조차 없는 창녀라는 생각이 든다. “신은 순수한 목적으로 행한 죄악을 용서
하신다”면서 수녀들마저 설득에 나선다. 마침내 ‘비계 덩어리’는 프러시아 장교를 찾아
간다.

덕분에 마차는 이튿날 자유의 땅으로 떠난다. 이때 희생양이 수치심에 떨며 마차에 오른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녀에게 보여준 것은 자신들을 구해준 동포 여인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아니다. 짐승 같은 적군장교에 대한 공분도 아니다. 그것은 더럽고 불결한 존재와 접촉을 피
하려는 안간힘이다. 적군의 노리개에 대한 철저한 외면이다. 자신들은 음식을 먹으면서 누구
하나 이 여인에게 음식을 권하지 않는다.

‘비계 덩어리’는 수녀들에게는 음욕의 화신이요, 귀부인들에게는 여성의 수치가 되어 있
었다. 또 프랑스 국가를 읊조리는 공화주의자에게는 적군의 위안부였다. 그녀는 배고픔과 수
치, 분노로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계곡에 쌓인 쓰레기 무더기들을 보면서 모파상의 ‘비계
덩어리’가 갑자기 떠올랐다. 삼림욕이다, 웰빙이다, 음이온이다, 혹은 피서다, 휴가다 하면
서 우리는 자연을 즐겨 찾는다. 자연이야말로 우리가 의지하고 깃들 곳이며 함께 살아야할
어머니 품이라며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기도 한다. 그러나 곧바로 버린다. 은혜를 저버린다.
입장료를 받지 않는 곳은, 가족이 놀던 숲 속이든 낚시를 하던 해안이든, 쓰레기가 무더기로
방치되어 있다. 자신의 희생을 모르고 타자의 희생만을 요구하는 사회상을 반영하듯 여름
내내 찾는 산과 숲, 계곡과 해안은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쓰레기로 오염된 자연을 보면서 ‘비계 덩어리’가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함께 한 사람들을 위하여 스스로 준비한 음식과 자신의 몸을 다 바쳤으나 결국은 버림받은
모습이 똑같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과연 자연을 존엄성과 인격이 거세된 창녀로 취급해도
되는 걸까. 자연은 정말 우리가 필요로 할 때는 무조건 우리를 받아주고, 떠날 때는 마구 짓
밟히는 ‘비계 덩어리’인 것인가. 내년에는 어딜 찾고 후손들은 어딜 찾으라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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