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정규편집부국장 |
보자는 만남이다. 하지만 이 모임은 어쩌다 보니 ‘백수’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매
번 화두는 먹고 사는 문제이고 끝내는 울분으로 이어진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경기
에서 시작된 대화는 몇 순배만에 과거 구조조정에 이어진 명퇴로 옮겨갔고 궁극적으로는 노
후걱정으로 끝을 맺었다. 그것도 시련과 아픔을 되새기며 불안한 미래를 뒤로한 채 말이다.
물론 이들 중에는 IMF 이전만 해도 현실에 대한 걱정은 남의 얘기였다. 시쳇말로 잘 나가
지는 않지만 그래도 당당하게 내밀 명함이 있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어떤가. 이들에겐
그런 자긍심이 사라진지 오래다. 구제금융, 퇴출, 구조조정 등을 거치면서 본의 아니게 실업
자로 전락해야 했다. 말그대로 사오정이 돼 버린 것이다.
그래도 정작 그 때는 걱정이 덜 됐다. 당시만해도 가능성있는 젊음이 있었고 퇴직금 위로금 등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덜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2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구직은 하늘의 별따기가 돼 버렸고 주머
니 사정은 이미 새 깃털 만큼이나 가벼워졌다. IMF 체제라는 재앙이 가져다 준 예기치 않
은 시련과 아픔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걱정은 그것 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준비 없이 닥칠
노후를 생각하면 지금까지의 고통은 새발의 피다. 돈없이 노후를 맞은 주변 노인들을 보면
가히 공포요 재앙이기 때문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나서, 늙고, 결국은 병들어, 죽는다는 것을 일컬
는다. 이는 만고 불변의 진리요, 우주 만물의 섭리다. 아무리 과학문명이 발달한다 해도 시
차가 있을 뿐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기에 ‘어떻게’ 라는 의문 부호가 붙으면
그 의미는 사뭇 달라진다. 어떻게 나고 늙어 병들고 죽는지 각 과정을 들여다 보면 더욱 그
렇다. 사람이 나서 죽기는 예외없이 똑같지만 삶의 질은 천차만별이다. 그야말로 사람답게
사느냐는 어떻게의 척도에 따라 그 질이 달라 질 수 밖에 없다. 흥망성쇠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그 과정속에는 우리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경우의 수가 있다. 금의환향, 패가망
신,입신양명, 독거노인, 황혼이혼, 홈리스 등으로 설명되는 삶의 결과들이 이를 반증한다.
하지만 이 시대에 시련을 겪고 있는 40~50대에겐 그야말로 부귀영화의 기대치는 없어 보인
다. 우리사회의 주력으로 부상할 즈음 그들 대부분이 정리해고 등의 이름으로 격리됐기 때
문이다. 당연히 자본축적은 고사하고 하루 해가 너무 긴 사람도 한 둘이 아니다. 안타깝지만
그 세대들이 짊어진 멍에요 굴레인 셈이다.
이쯤되면 20년후 이들의 노후는 불을 보듯 뻔하다. 말이 삶이지 가난의 질곡에서 허덕일 것
임은 뻔하다. 그도 그럴것이 국가재정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고 각종 연금은 이네들이
수혜대상이 될 즈음 고갈될 것으로 예고중이다. 그렇다고 시대조류를 뛰어 넘어 하나 둘 밖
에 없는 자녀들에 의지한다는 것은 더 더욱 곤란하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너무 큰
짐이기 때문이다. 결국 도달하는 종착역은 궁핍일 수 밖에 없다. 이 쯤에선 삶의 질은 이미
남의 나라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최근 일본의 도요타는 정년을 65세 까지 전면 확대하기
로 했다는 소식이다. 이웃나라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법적으로
정년이 60으로 정해지던 때와 지금의 60대의 건강은 이미 비교 대상이 아니다. 충분히 일을
할 수 있고 그같은 노동력의 방치는 국가적 낭비다. 하물며 정리해고 등으로 집단 실업에
빠져있는 40~50대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이 일하고 싶어하는 한
일자리를 찾아줘야하고 정년도 연장해 줘야한다. 그들도 사람답게 노후를 맞게 하려면 본의
아니게 빼앗긴 직장과 준비시간을 줘야 한다. 국가와 국민 모두는 그렇게 해 줄 책임과 의
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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