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부터는 영화의 한 장면을 상상하면 된다. 심해(深海)의 캄캄한 두려움 속에서 안전벨트를 풀고 수압(水壓)으로 열리지 않는 문을 간신히 들어 올려 그 밑으로 헤엄쳐 탈출을 했다고 한다. 온 몸의 뼈가 다 부서져 종합 병원에 한 동안 입원을 해야만 했다.
의사들은 생명을 건진 것이 기적이라고 했다. 성형외과와 정형외과, 안과를 돌아가며 수술 받고 치료를 받았다.
덕분에 나도 병원을 내 집처럼 드나들다가 문득 문학을 하는 것도 외과의 수술과 같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메스 대신 펜을 들고 우리의 정서와 사상을 골격으로 삼아 마취약 대신 상상(想像)의 힘을 빌어 쪼개고, 다듬고, 꿰매어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다.
시 소설 희곡 평론 수필을 포함한 모든 장르는 종합병원의 여러 과(科)들과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병원이 인간의 몸을 다루는 것이라면 문학은 역사를 통해 현재에 사는 인간을 소재로 한다.
몸의 병을 고치러 병원의 간다면 우리는 마음의 병을 고치러 문학을 하는 것이 아닐까? 아픈 부위에 따라 병원에 과가 나누어지듯 개인의 성향과 기질에 따라 문학도 장르를 구분해서 선택하는 것이다.
문학의 기능은 스스로 깨닫게 하는 교시(敎示)적 기능도 있지만 쾌락적 기능도 크다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모방은 ‘즐거운 행위’라고 하였다. 이 즐거움은 카타르시스(katharsis 淨化)에 의해 얻어 지는 것이다. 카타르시스는 배설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인간의 감정을 극적으로 분출시킴으로써 즐거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가슴속에 오래 된 우물을 한 개쯤 갖고 있다. 그 우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가라 앉아있는 앙금들이 보인다. 그들을 체로 건져내어 햇볕을 쪼이고 바람에 잘 말려서 문자로 형상화시키는 것이 문학을 하는 첫 출발이리라.
문학하는 일을 업(業)으로 갖지 않더라도 우리는 궁극적으로 문학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 곳에는 오래된 우리의 아름다운 시절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 삶이 신산(辛酸)하다고 느껴질 때 골방에 박혀 백지에 아주 쉬운 언어를 풀어 놓아보자. 어쩌면 그 문자들이 우리를 구원해 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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