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같이 온습지수(불쾌지수)가 높은 날엔 이것이 빌미가 되어 싸움이 벌어져 폭행으로 치닫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C씨의 경우도 그랬다. 영문학을 전공한 그가 외국에 나갔다가 한 외국 여성과 자기 딴에는 점잖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난데없이 그 외국 여성이 다가들더니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뺨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억울하게 여길 겨를도, 화를 낼 겨를도 없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켕기는 일이라곤 손톱만큼도 한 일이 없는 C씨는 당황한 나머지 얼굴이 홧홧거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화를 내고 박차고 나올 상황도 아니었다.
무엇이 이 미모의 여성을 화나게 했을까? 문제는 시선이었는데 그 해답은 잠시만 뒤로 접어두자.
내게는 프랑스 생활 10년 될까말까한 조카딸이 있다. 현재 파리에 살고 있는데 언젠가 그녀를 만났을 때 무슨 언어로 꿈을 꾸느냐고 물었다. 언어가 너무 유창해 했던 물음이었는데 그 대답이, 대개는 프랑스어로 꿈을 꾸고 사색을 한다고 해서 내심 섭섭하게 여긴 일이 있다. 이제 프랑스 사람 다 됐구나 싶은 생각에서였다.
언젠가 골프 선수 박세리가 미국 LPGA 진출 몇 해만에 입이 뻥 뚫리고 귀가 열렸다 해서 골프 실력보다 더 주목을 받은 일이 있었다. 한 라운드 돌고 나서 영어로 장황하게 복기할 정도의 영어 실력이라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만하면 골프 코스에서 미국식으로 생각하는 수준에 이른 셈이라 할까?
하여튼 이 영어식 사고는 그만두고라도 아주 기본에 해당하는 매너를 몰라 쩔쩔매는 수가 많다. 외교 현장이나 잘 나가던 사업상의 상담(商談) 마지막 단계에 산통이 깨졌다면 협상력 이전에 문화 차이가 원인일 수가 있다.
방해받지 않는다고 느낄 만큼의 친근하고 편안한 거리, 즉 두 걸음 이내의 지근거리 또 대인거리라는 것도 우리에게는 생소하기만 하다. 시선 처리도 애매하기 짝이 없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어려운 사람을 만나고 나면 뒤에 턱 밑의 수염자국만 겨우 기억나기도 하는 것이다. 부부간에도 일껏 오래간만에 찬찬히 뜯어보고 "당신도 많이 늙었구려" 하는 식인데, 하물며 외국인 앞에서랴?
우리의 중대한 실수는 외국어를 배울 때 그 나라의 문화도 함께 배워야 하는데 우린 그걸 배운 적이 없었던 것이다. 어찌어찌 블랭크(빈칸) 안에 단어 필하기(채워 넣기)가 고작인 교육 덕에 영어 벙어리를 모면했다 해도 사정은 대동소이하다 할 것이다.
아까 그 영문도 모른 채 뺨맞은 C씨의 경우도 그랬다. 깐에는 조심한답시고 시선을 너무 아래를 내리깔았던 게 화근이었다. 그의 시선이 미모의 외국 여성의 젖가슴께에 머문 것으로 인해 치한쯤으로 오해를 산 결과였던 것이다. 뺨을 맞기 전까지는 상대의 미간, 즉 눈과 눈 사이를 보아야 무난한 줄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던 결과였다.
항상 눈을 응시하고 반응도 체크하며 대화하라는 말은 들어본 적도, 더더욱 배운 적도 없는 C씨였다. 한 나라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와 인식과 사고 체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임은 외국 여성에게 수모를 당하고서야 알아낸 뼈저린 경험이었다.
참으로 그게 말이 쉽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외국 여성이 아닐지라도, 여름철이라 시선 처리가 곤란할 때가 많은 요즈음이다. 보고 싶은 것을 일부러 고개를 외면하거나 눈을 질끔 감고 다닐 것까지는 없고…… 슬쩍 '담배씨'만큼만 잘 보는 것도 지혜가 아닌가 한다.
얼마큼 봐야 하는지 굳이 물으신다면, 이런 민요를 들려주고 싶다.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자야 연적 같은 젖 좀 보소 많이 보면 병이 난다 담배씨 만큼만 보고 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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