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와 무관하지 않았던 학생시절을 보낸 우리에겐 이것은 분명 전쟁이었다. 신문사 기자가 꿈이었고 교사셨던 아버지께 짐이 되기 싫었던 한 청년에게 학생운동은 가까이 하기에는 먼 남의 일에 불과했다. 고등학교 때까지의 획일화된 교육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던가, 그 청년은 강의실보단 막걸리 냄새가 풍기는 학교 동산이나 허름한 술집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대학 2학년이 된 청년은 담을 쌓고 살았던 학생시위에 동참하게 된다. 당시 조선대 이철규 학생의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시험거부 및 가두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그리곤 그해 여름이었던가,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처럼 고단하게 몸뚱이를 지탱하고 있는 광주 망월동 구묘역을 처음 찾았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이 밝혀지기 훨씬 전이었던 시절, 억울하고 슬픈 원혼들이 잠들어 계신 적막의 묘에서 바람도 울고 새들도 울고 모두가 울고 있었다. 어떻게 8개월된 임산부를 그것도 총검으로 무자비하게 살육할 수 있단 말인가? ‘여보 당신은 나에게 천사였소’라는 묘비명 앞에서 그 청년은 한없이 작아지고 있었다. 전두환 前 대통령은 그 청년의 삶을 그렇게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12·12 군사쿠데타로 국권을 유린하고, 무고한 광주시민을 잔인하게 학살하며 정권을 찬탈한 사람이 호젓하게 현충원을 방문한다는 것이 정상적인 뇌구조를 갖춘 사람이라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산화한 호국영령이 잠들어계신 국립묘지에 국권을 찬탈했던 인물이 참배를 하고, 신당을 준비하고 있는 모 지사는 동행까지 했다하니 그러한 빈곤한 역사의식으로 무슨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는 것인지, 개탄스럽고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차를 바꿔타고 도망치듯 현충원을 빠져 나갔다. 정공법을 즐겨쓰던 그가 우회전술을 쓰는 것을 보니 유연해진 것인가, 나이가 들어 비겁해진 것인가?
고급 승용차 타고 몇십명 동원하여 현충원 방문할 시간이 있으면 추징금 갚는 것이 인간의 도리다. 다시는 현충원에 발을 들여놓을 생각조차 하지 말길 정중하게 권고한다. 도망다니면서 살기엔 자손들에게 너무 부끄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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