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은 예술 자체로 평가해야 이데올로기로 재단하는 것은 비극”
대전 한복판에 고암 이응노(李應魯) 미술관을 세운다는 보도에 시민들은 ‘다행스럽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고암은 작품세계나 인품에 앞서 ‘동백림사건’ 연루자로 떠오르는 건 무엇 때문인가. 동백림 사건은 박정권의 국면 전환용 조작극이라 혹평하거나 다른 편에선 하자나 트집이 없는데도 마구 잡아넣고 사형, 무기징역을 때렸겠느냐고 응수한다. 그러니 ‘동백림사건’을 다루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이 사건의 연루자는 주로 베를린, 파리에 거주한 자들로 큰 사건인데도 누구하나 사형을 당하지 않고 모두 풀려났다. 어떻든 이 사건의 중심에 음악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노가 있었다. 서울에 송환 구속되었다가 파리로 돌아간 후 이응노는 고향에 가고 싶어도 여의치 않았다.
귀국 전시를 갖고 싶어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한 고암의 미술관이 대전에 들어선다는 보도를 접하고 필자는 ‘안토니오즈’ 프랑스 문화성 예술 창작국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파리에서 인터뷰를 가질 때나 한국(대전)을 찾아왔을 때도 이응노에 대해선 말을 아꼈는데 기억에 남는 한 구절이 있다. “예술인이 예술의 잣대로 평가를 못 받고 이데올로기 잣대로 재단(裁斷) 한다는 건 불행한 일”이라던 그 이야기.
▲ 고암 이응노 화백. |
드골 대통령의 조카사위와 회견
‘안토니오즈’씨는 프랑스 문화성 고위 관리의 한 사람. 그는 20년간 문화 예술 창작국장을 맡아 왔지만 바람을 타지 않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정권이 바뀌거나 인사의 회오리가 불어 닥쳐도 끄떡없이 그 자리를 지켜온 노장. 거기엔 관록, 노련미, 전문성이 그를 뒷받침해 왔다. 그는 프랑스의 국부 ‘드골’ 대통령의 조카사위이지만 단 한 번도 대통령을 들먹인 일이 없었고 특혜 또한 받은 일이 없다고 했다.
지난 80년대 우리 정부가 그에게 훈장을 주려 했지만 사양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만큼 겸허하며 성실하다는 데서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2차 대전 때 ‘나치’가 ‘프랑스’를 덮치자 그는 총을 잡고 ‘레지스탕스’대열에 가담했고 지금의 부인도 그때 만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부 총잡이’였다고 웃으며 그때 일을 회고하는 안토니오즈 국장.
‘프랑스’인은 ‘에고’에 치우치다가도 일단 유사시엔 이렇듯 총을 잡는 애국심을 발휘한다. 지난 80년대 이야기지만 필자가 ‘파리’에서 그를 만나고 돌아온 다음해 한국정부가 그를 서울에 초청한 일이 있다. 한국에 온 김에 ‘백제 문화권’을 보고 싶다 해서 그를 부여로 안내했다. 부여 박물관, 낙화암, 고란사와 정림사지 등을 돌아본 후 저녁식사를 구봉농장(九峰農場)에서 들었다. 사슴고기며 쑥 국수, 계피술 등을 들면서 더 없이 즐거워하는 노부부였다.
필자가 ‘파리’에 갔을 때 당초엔 ‘안토니오즈’씨 회견 계획은 없었다. 그에겐 매우 미안한 이야기지만, 당초엔 지금의 ‘시라크’ 대통령이 파리 시장시절 그의 회견을 요청했던 것
지방지의 설움은 이런데 있다. 하기야 ‘시라크’는 유럽을 통합시킨 대표적 인물이 아닌가. 그는 또 ‘미테랑’ 전 대통령의 맞수로 파리 시민들은 일찌감치 차기 대통령 감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시라크’ 시장은 그렇게 회견에 응하기로 하면서 다음주 수요일 오후 3시로 못 박았다.
그날이 금요일이던가. 그렇다면 닷새 후의 일이다. 국제 전화로 회사 사장에게 이 뜻을 전했다. ‘시라크’ 시장을 만나고 가겠노라고. 사장은 버럭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창간 기념 날짜가 코앞인데 편집국장은 파리에서 늑장 부릴 셈”이냐며 꾸중이 열화 같다. 하는 수 없이 스케줄을 바꾸기로 했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그냥 돌아갈 필자가 아니다. 여기서 대타(代打)로 삼은 게 ‘안토니오즈’씨였다. 그를 찾아간 것은 오후, 황혼 무렵이다. “엑스꿔제 무아” 노크를 하고 유학생을 대동,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다부진 몸을 일으키며 자리를 권했다. 즉시 회견에 들어갔는데 주제는 ‘파리에서 바라본 동양의 문화예술’이었다.
파리에서 내다본 동양예술 (▷안토니오즈 ▶필자)
▶파리시민의 특성이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프랑스는 인본, 종교, 예술문화 등 각 분야 것을 포옹하려 노력한다는 점입니다. 어느 특정세력이나 국가, 사조 등에 치우치질 않고 합리적인 데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코스모폴리탄의 개념을 말하는 것인가요?
▷프랑스엔 관광객(단순 손님)말고도 많은 예술인 유학생이 와 있습니다. ‘뚜루소’라는 도시는 인구 40만에 학생이 5만입니다. 중국 유학생만도 25개 도시에 산재해 있고 한국유학생들도 전국각지에 있습니다.
▶순수미술과 통속의 한계, 이 양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보십니까? 다시 말하면 ‘본격’과 ‘통속’의 한계가 모호해지는 경향 같은 것에 대해서.
▷대중은 예술 앞에 100년은 뒤에 서기 마련입니다. 그 증거로는 ‘피카소’나 ‘루소’처럼 오랜 시공이 지나야 대접 받게 되죠.
위대한 예술가는 늘 예언자적인 데가 있었지요. 그들의 예언은 적중을 하고 시민의 길잡이가 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보들레르’의 시에 ‘등대’라는 게 있습니다. 예술가는 시민의 ‘등대’임을 암시한 말입니다. 그 어둠을 밝혀 선박의 항로를 터 준다는 뜻입니다.
▶과학의 편만(遍滿)으로 예술이 위압 받아 주눅 드는 현실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시나요? 메커니즘의 위압 같은 것 말입니다.
▷걱정되는 건 과학의 발달이 아니라 문화예술이 뒤따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한국작가도 노벨상 받을 것”
▶노벨상이 유럽 중심으로 주어진다는 점과 스웨덴 한림원의 심사가 때로는 잡음 같은 걸 일으키는 걸로 아는데 이 점 한 말씀을.
▷유럽인 수상자가 단연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등 이상할 게 없습니다. 대상자가 유럽에 많다는 점과 동양권이 아직도 노벨상 대상 또는 그 분위기에 접하지 못했다는 점이 지적돼야 할 것 같습니다.
▶동양에선 ‘타고르’와 일본의 ‘가와바타’와 ‘오에’가 탔습니다만.
▷머지않아 한국작가들도 타게 되겠지요.
▶예술문화에 있어 동양적인 것, 즉 선(禪) 같은 것에 대해선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
▷동양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양 것에 우월하다는 생각은 비약입니다. 예를 들어 산수나 꽃, 소나무 그림이 동양 것이라 해서 우대받아야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요.
▶동양예술의 유럽 상륙 실상에 대해서는….
▷먼저 말했듯이 프랑스는 동양문화를 ‘터부’시 하질 않습니다. 지표상에 있는 모든 것, 어떤 ‘장르’든 포용하겠다는 게 우리의 기본 입장입니다. 동양에서 많은 예술인들이 이곳 파리에 와 있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하고 있는데 나 자신도 동양을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갖고 지켜봐 왔습니다. 중국의 ‘자우기’ 대만의 ‘장대천’ 등 화가들이 파리에서 오랜 세월 활동을 해왔죠. 바로 그저께 자우기 씨를 만났더니 30년 만에 북경에서 개인전을 마치고 돌아왔다고 말하더군요. 재미있는 건 30년을 파리에서 활동해왔는데도 북경에선 ‘자우기’는 동양화가라고 말한다는 거죠. 엊그제 이야기입니다.
한국 국보반환 여부는 ‘함구’
사이였지요. 운양호(雲揚號)사건 말입니다.
▷압니다. 당시는 개항요구라든가 영토전쟁, 약육강식이 통하던 때였지요.
▶당시 프랑스군은 우리의 국보 외규장각(外奎章閣) 문서 등을 다량 빼앗아 갔는데 이는 서둘러 반환해야 옳지 않은가요?
▷그것은 본인 소관이 아닙니다. 국가 간의 외교문제가 돼서.
▶동백림 사건 때 ‘고암 때문에’ 양국 사이가 불편을 겪었지요?
▷예술가가 예술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재단한다는 건 비극입니다.
▶자주 만나는 한국 화가는?
▷있지요. 예를 들어 고암 이응노와 남관(南寬)씨 등 여러 화가를 접했습니다만. 이응노는 훌륭한 화가입니다.
▶한국화의 특징을 든다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습니다만, 사군자(四君子) 같은 건 똑같은 수법이라는 점에서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예술에선 개성(남다른 점)을 강조하기 마련인데 그 작품이 그 작품 같아서.
▶동양에서만 유독 서도(붓글씨)가 성행하는데 이 점은?
▷붓글씨는 ‘서도’이지 예술품은 아니라는 게 유럽인의 시각입니다. 어떤 틀을 본딴다는 건 예술 활동이 아니라 복사(기능)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눈여겨 본 동양화가는?
▷중국(북경)의 자우기와 한국의 고암, 대만의 장대천(張大天), 일본의 옛 화가 셋슈(雪舟) 등이지요.
▶한국에 대해 어떤 것을 알고 계십니까?
▷저는 일본을 5회, 한국을 3회 다녀왔습니다. 헌데 일본은 한반도의 영향을 받아 오늘의 풍요를 누린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인터뷰는 끝났다. 이응노는 냉전시대의 희생양으로 한 시대를 살다간 인물이다. 서울~평양의 완충지대에서…. 그러다가 죽은 뒤에 고향에 돌아오는 셈이다. 짐짓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국왕의 말이 생각난다. “현대인은 두 갈레의 철조망 중 한 가닥은 잡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두 갈래 철조망 그 새 중간 완충지대(buffer zone)에 서 있다”라며 북경에서 주은래 식객노릇을 하던 시아누크. 하지만 이젠 완충지대도 의미를 상실한지 오래다. 그러니 고암의 생애와 미술세계도 재평가 받을 날이 다가 올 것이다. <前 중도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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