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순택 논설위원 |
박세리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명예의 전당 입회가 고비였던 걸까. 이후 열린 사이베이스 클래식부터 줄곧 내리막길이다. 올 들어 10개 대회에 출전해 단 한 번도 톱10에 들지 못했다. 톱10은 고사하고 예선탈락 아니면 꼴찌다. 슬럼프치고는 지독한 악성이다. US여자오픈서도 16오버파 공동 45위다. 펑펑 울기까지 했단다. 후원사인 CJ관계자와 전화통화에서 “도대체 마인드컨트롤이 되지 않는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거다. 미국 언론의 표현을 빌자면 ‘머신라이크(machinelike, 기계 같은)’인 그가 말이다.
왜 헤매는지 왜 눈물을 흘려야 했는지는 자신만이 알뿐이다. 하지만 팬들은 당당한 그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골프 관련 인터넷사이트는 부활을 바라는 팬들의 갑론을박이 뜨겁다. 한쪽에선 “다른 일도 즐기고, 좀 쉬라”하고, 다른 한쪽에선 “골프가 인생의 전부였던 만큼 그 곳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한다. 한 누리꾼은 “예전과 같이 골프에 미쳐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골프를 잘 쳐야 행복한 선수가 골프를 제쳐 놓고 다른 취미를 갖는다고 해서 행복해지진 않는다”고 충고한다.
전문가들은 ‘쉬라’는 쪽이다. 한 스포츠신문에 따르면 김재열 SBS해설위원은 “동계훈련을 시작할 때까지 기본적인 체력훈련만 하고 골프채는 놓으라. 그게 미래지향적인 결정”이라고 말한다. 아예 필드를 떠나라는 거다. 임경빈 KBS해설위원도 동의한다. “골퍼 박세리가 아니라 인간 박세리로서 쉬면서 이것저것 다 해보다 보면 ‘역시 나는 필드에 있어야 하고, 애니카 소렌스탐을 잡아야겠다’는 목표가 생기지 않겠느냐”는 거다.
쉬든 뛰든 결정은 박세리 자신의 몫이다. 뉘라서 뛰겠다는 선수에게 ‘시즌을 접어라’고 대놓고 말할 수 있으랴. 쉰다고 해서 다음 시즌에 살아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훨훨 나는 모습을 어서 보게 되면 좋겠다.
박세리가 누군가. 98년 US여자오픈에서 발목을 걷어붙이고 연못에 들어가 볼을 쳐낼 때 통통한 종아리가 미스코리아의 각선미보다 훨씬 예쁘게 느껴졌었다. 까맣게 그을린 종아리 밑에 하얀 발목은 갑작스런 외환 쇼크에 갈팡질팡하던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비춰줬었다. 우승자는 많아도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스타는 드물다. 슬럼프를 딛고 일어나 멋진 ‘부활샷’을 쏜다면 이번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줄 거다.
믿는 구석도 있다. 탄탄한 두 다리를 버팀목 삼아 힘차게 휘두르는 스윙이 여전히 살아있다. 페이스만 되찾으면 얼마든지 정상권을 넘볼 수 있다는 얘기다. 여자프로골프에서 소렌스탐에 대적할 선수는 박세리뿐이라는 평가는 괜한 공치사가 아니다. 98년 이후 지금까지 22승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주말골퍼 수준”이라는 평가절하나, “돈을 벌만큼 벌어서 그렇다””애인 때문이다””성형수술을 했다”는 입방아는 나중에 찧어도 되잖는가. 진득하니 믿고 기다려 줄 참이다.
박세리 얘기를 하다보니 우리 삶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슬럼프가 꼭 스타에게만 오는 건 아니잖는가. 슬럼프에 빠진 사람이라면 알아야 할 게 있다. 슬럼프는 성공하려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시련이라는 걸, 슬럼프가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더 높이 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라는 걸 말이다. 박세리나 우리나 다 마찬가지다. 다시 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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