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러한 이론과 실천이 명실상부하지 않은 데서 문제가 생긴다. 거기서 정교와 사교가 갈리고, 또한 종교간의 우열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 훌륭한 교주와 교설이 여법하게 실천되면, 그대로 정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박애와 구원을 내세우면서 투쟁과 박해· 살상을 서슴지 않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이 사교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이 이론과 교설에 비하여, 그 실천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등·저질의 종교가 아니겠는가. 여기서 ‘종교는 실천이다’라는 명제가 진리로 떠오르는 터다.
흔히들 불교는 실천이라고 한다. 이는 불교가 실천의 종교임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불교는 교조 불타와 그 교설로서의 진리·경전, 그 교화적 중재로서의 승단이 체계적이고 투철한 데다, 그 실천이 거의 완벽하게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를 일러 종교 중의 종교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런 근거에서 연유된다. 불타는 삼계도사·사생자부로서, 그 법력과 위신력이 실천으로 나타나고, 보현보살의 실행과 관음보살의 자비, 대세지보살의 파사현정, 지장보살의 대원력이 실천으로써 바로 보살도의 무한 권권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는 현실적으로 그 이론·교법과 실천·궁행이 완전히 부합되고 있는가. 실로 이 점에 대하여 장담할 수는 없다. 냉철히 살피면, 종단이나 사찰, 승·속간의 개인이나 대체 등이 그 실천면에 적지 않은 문제점을 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교는 실천이다’라고 강조하여 마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실감으로 파고들 때, 참회·각성하는 편이 있을 것이고, 고무· 격려되는 편이 있는 게 사실이다. 이제 불교가 새로운 문화 세기에 상응하여, 중흥의 기운을 타고 있는 이 때에, 대체로 실천을 강조하고, 그대로 따르는 게 대세이지만, 그래도 내부적으로 불화·암투하고 삼학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례가 있어 많은 사람들을 실망케 하여 왔다. 이렇게 말만 앞세우고 속으로는 그 반대의 일을 저지르는 대소 간의 잘못이나 실수가 엄청난 폭약이 되어, 불교계의 비약적 발전을 가로막고 스스로 병들게 하여 온 것은 우리에게 반성과 참회의 거울이 된다. 솔직히 속을 들여다보면, 심각한 위기가 서서히 다가오는 형국이다.
이러한 내적 병폐를 제거·치유하는 데는 대단한 명약과 신기한 의술이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이러한 병을 단번에 쾌유시키는 명약 중의 명약이 있다. 그게 바로 그 실천으로 위대한 성인, 불타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일이다. 그 분의 가르침은 너무도 뚜렷하고 실천하기가 쉽다. 더구나 그 분은 몸소 그 실천의 길을 앞장서 이끌어 주었다. 이에 거창한 말씀은 접어 두고, 그저 사홍서원만이라도,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번뇌를 다 끊으오리다’,‘법문을 다 배우오리다’,‘불도를 다 이루오리다’,이렇게 서원하고, 그저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올바로 실천된다면, 이는 그대로가 불교의 전체요 완성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문화불교와 행복불교, 생산 불교로 중흥을 내다 보는 불교계에서, 이런 실천마저 못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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