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박상배 정치부장 |
17대 총선 당시만 해도 질풍노도와 같던 집권당의 기세와 국민적 성원이 불과 1년만의 재보선에서 이토록 바닥을 칠 수 있다는 말인가.
공동정부와 참여정부를 잇따라 태동시킨 ‘서편’ 두 축의 정치적 유산마저 소진한 열린우리당의 근원적인 결함은 도대체 뭘까. 아무래도 정치적 신의와 신뢰, 도덕성 등 내재된 문제로 귀결된다. 그 중심에 민주당과 자민련이란 부침의 정당사에서 중요한 교훈을 찾아야 할 듯 싶다.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로 일컬어지는 김영삼,김대중 두 정권의 출범에 충청권의 잇단 역할론이 분명 있었다. 산업화를 거쳐 민주화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5·16의 또 다른 주체인 김종필 전 총재, 그리고 그의 지지기반인 충청민심이 시대조류를 읽는 혜안은 민주화 시대 개막에 한몫을 담당했던 것도 사실이다.비록 영·호남 패권정치의 틈새에서 충청권의 자생적 활로와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으로 곧잘 폄훼되긴 했지만, 적어도 이같은 역사인식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두 정당의 정치적 말로가 군소정당의 비참한 형세로 내쫓긴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90년 3당 합당을 통해 태동한 김영삼 정부는 ‘역사바로세우기’를 내세워 당시 민자당내 구세력을 잇따라 내쳤다. 같은 영남의 한쪽으로 민정당 세력인 TK(대구·경북)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자 민주당 세력인 PK(부산·경남)을 둘로 갈라놓고 말았다.
곧이어 김종필 전 총재로 상징되는 충청권의 신민주공화당 세력을 당의 간판으로 세울 수 없다고 내침으로써 배척 당한 TK와 충청이 한맺힌 결합에 이르게 됐다. 말이 좋아 ‘역사바로세우기’였지 사실상 권력분점을 골자로 한 ‘내각제 합의개헌’의 금석맹약을 파기하기 위한 잔존세력의 일거 소탕이요, 거세였던 셈이다. 내침을 당한 잔존세력들은 김 전 총재 중심의 자민련을 만들어 95년 지방선거에서 창당 불과 3개월만에 전국정당의 중심에 우뚝 섰다.
이듬해 15대 총선에서도 부지불식간에 50석을 넘는 제3의 원내세력으로 당세를 재건했다. 결국 DJP단일화로 이어져 YS정권의 권력재창출에 결정적인 걸림돌로 작용해 새로운 공동정부 출범에 기폭제가 됐다. 이런 정치적 신의와 신뢰·도덕성의 문제가 근자에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아래서 재연되고 있는 느낌이다. 유전게이트와 행담도 개발의혹사건 등은 측근과 비선라인에 권력의 무게중심을 둔 필연적 결과일 수밖에 없다. 아직껏 대선승자의 넉넉한 미덕보다는 악전고투의 원한을 삭이지 못하고 공적 ‘시스템’ 밖에서 벌인 일들이다.
대통령 자신이 정치적 태반인 민주당을 허물고 명실상부한 집권여당으로서 열린우리당을 새롭게 출범시킨 금자탑을 연거푸 쌓아 올렸다. 한때의 ‘정치9단’들도 이루지 못한 꿈을 현실화 시켜놓은 자부심도 대단했다. ‘호남자민련’으로 전락돼 고사될 것이라던 민주당이 호남민심의 중심으로 일대 회귀하는 현상들이 뚜렷하다. ‘행정중심복합도시’ 안착과 함께 권력의 ‘빅3’로 꼽는 국무총리와 청와대비서실장 등 충청인 전성시대 라지만, 요즘 외화내빈이란 인식에 뜨악한 분위기가 역력하다.
집권세력의 반작용에 ‘호남자민련’은 뜨는데, 정작 충청자민련의 비상에는 어떤 문제가 걸려있는 걸까. ‘통합과 융합의 시대’에 충청권 내부가 자민련과 신당추진 세력 둘로 갈라져 평행선 위의 역주행만을 거듭하고 있다. 이러고도 호남과 달리 조직적이지 못한 충청인의 출신성분과 성향만을 투정할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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