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교시 수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복도에서 어수선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아니나 다를까 한 무리의 장승들이 얼굴을 내민다. 금세 교실은 ‘와아’소리가 나고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우리 4학년 꼬맹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들썩들썩 자리에서 뛰쳐나온다.
2년 전에 가르쳤던 제자들이다. 중학교가 바로 옆에 있는 관계로 짬이 날 때마다 종종 찾아와 맛있는 것 사달라고 떼쓰던 아이들인데 몇 달 동안 뜸했다. 얼굴은 벌써 청춘의 그림자가 여기저기 꽃을 피우고 나를 위에서 한참을 내려다 볼 정도로 커버린 키에 순간 나는 반가우면서도 어색함을 느꼈다.
“야, 반갑다. 너희들 이 시간에 웬일이니?” “중간고사 시험이라 일찍 끝났어요.”
“그래도 고맙다. 아직까지도 선생님 잊지 않고 이렇게 찾아와 주고.”
“중학수학, 너 이제는 중학생이 되었으니 고등수학으로 별명이 바뀌지 않았니?” 작년에 매일 중학생용 수학 문제집을 학교에 가지고 와서 1년을 앞선 진도로 나를 곤욕스럽게 한 아이였다.
“어유, 우리 윤하는 키가 얼마야, 정말 많이 컸다. 몰라보겠어.” 친구들이 하마라고 1년 내내 놀려도, 어떤 힘든 일에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아 내가 참 예뻐한 아이다.
“너희들, 배고프지. 점심시간인데 선생님이 데리고 나가서 뭐 사줄 수는 없고 가다가 음료수나 사먹어라.” 나는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네주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이 녀석들은 나를 찾아올 때면 항상 ‘선생님, 배고파요. 먹을 것 좀 사주면 안돼요. 선생님 과자 있으면 좀 주세요’ 하고 다 큰 중학생이 유치원생처럼 조르고 투정부리며 항상 달라고만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철들 것 같지 않던 형찬이까지 정색을 한다.
급기야는 짐짓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억지로 주려고 하자 이놈들이 뿔뿔이 도망간다.
나는 그렇게 보낸 아이들이 무척이나 서운했다. 마냥 어린아이인 줄 알았는데 벌써 철들었구나하는 생각에 무언가를 얻는 것도 같고 잃어버린 것도 같았다. 그래, 생각났다. 내가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 이 아이들이 나를 찾아 올 때면 어느새 나는 오빠가 되어있고 아이들은 어릴 적 순수한 내가 되어 있곤 하였다. 서울에서 오랜만에 고향 찾아 내려온 오빠를 만난 어릴 적 그 기분에 젖어버린 것이다.
‘오빠가 이번에는 무엇을 사왔을까?’ ‘오빠가 이번에는 용돈을 얼마나 줄까?’ 철들기 전에는 명절 때 마다 내려오지 못한 오빠가 원망스러웠고 내 선물을 사오지 못할 때는 투정도 부렸다. 그러나 철든 후 더이상 오빠의 가방을 풀지 않았고 오빠가 선물을 줄 때도 미안하고 죄송스러웠다. 오빠가 가져온 보따리만 풀어헤치던 철없던 그 시절이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런데 이 아이들은 지금 철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나는 철들지 않았던 천진한 그 때의 나를 잃어버렸다.
“얘들아, 선생님 슬퍼지려고 한다. 제발, 철 좀 늦게 들면 안 되겠니?”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