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나는 한 단체에서 진행하는 CEO들의 리더십에 관한교육에 다녀왔던 일이 있다.
그곳에서 나의 머릿속에 가장 많이 남았던 내용은 ‘먼저 이해하고 다음에 이해 시켜라’는 내용이었다.
선친으로부터 사업을 물려받은 한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정말로 열심히 사업을 펼치려 했으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을 통해 그 아버지의 경영방식을 듣고는 적지 않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맨주먹으로 사업을 시작해 수백 명의 직원을 거느린 중견기업으로 사업을 성공시킨 그의 아버지는 현장에서 맘에 들지 않을 경우 그 자리에서 육체적인 폭력과 모욕적인 발언으로 그 직원이 자기의 경영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날 저녁 약간의 돈을 그 직원에게 전해주는 것으로 모든 것을 이끌었는데 그 자식도 같은 방식으로 경영을 하는데 직원들의 반발이 심하고 통제가 안 된다”는 것이 그 사람의 말이었다. 상대방을 이해하려 하거나 대화하기 보다는 자기의 판단결정 원칙을 세우고 그것을 강제적 통제력으로 이끌어 가려고 하는 모습이 그의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졌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평가할 때 가장 약한 부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대화의 기술부족’을 지적한다. 대화는 내가 아닌 타인에 대한 배려이자 예의이며 타인의 의사를 경청하고 존중하여 상대를 먼저 이해하려는 출발선상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모습은 상대방을 이해하기위한 경청보다는 나의 주장이 먼저이고 나의 의사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그런 모습일 것이다. 대화조차 승패로 구분되는 사회, 대화에서 승리자와 패자가 결정되는 사회가 우리 사회이다.
대화란 상호 합의를 위한 최소한의 도구로 하나의 목표를 갖게 하고 자신의 패러다임을 보완할 수 있는, 그래서 각자의 노력에 의해 생산된 것의 합보다 더 많은 것을 산출 할 수 있는 시너지를 생산해 낼 수 있는 도구인 것이다. 바로 승승(win-win)의 원칙인 것이다. 우리 사회는 자기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대화의 구조를 거부하고, 대화를 중단하고 회의의 결과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일부는 자신의 기득권과 우위적 도구를 이용 자기의 논리만이 최고라고 결론내리고 그것의 관철을 위한 노력만 하고 있다.
우리사회가 대화가 어려운 것은 일방적 교육시스템과 전통적인 유교문화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타협과 야합을 동일시하는 문화적 정서에 있다고 생각된다. ‘야합은 틀린 것도 옳다고 할 수 있지만 타협은 다른 주장도 옳은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음에도 이를 동일시하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대화는 ‘상대방의 의견도 내 의견과 다를 뿐이지 그것도 틀리지 않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것을 부정한다면 우리 사회의 앞날은 그리 밝지 못할 것이다. 정치에서, 교육에서, 지역사회에서, 경제의 문제에서, 남북의 문제에서, 국제관계에서 대화의 원칙은 지켜져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가 더욱 성숙된 사회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나만이 아닌 우리라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대화의 기법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대재난의 시대에서 살아남고, 군중들의 혼돈을 피하려 한다면 우리는 서로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는 체임 포독의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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