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스승의 날이 되면 은사님과 그에 얽힌 일들이 떠오르곤 한다. 스승과 제자로 만나 같은 길을 함께 가는 동행이 되기까지 많은 사연들이 있었지만 유독 잊혀지지 않고 세월이 갈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일과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그당시 나는 박사과정 5학기에 재학중인 학생이었다. 교과목은 전공 세미나였는데 수강생은 나를 포함해 2명이었고, 2명이 소화해 내기에는 과중한 과제로 너무 경황없이 보내던 시기였다.
그때 다루었던 주제가 ‘Diffusion of Innovation’이었다. 너무 고생하면서 과제를 준비했던 터라 지금도 그때 상황을 떠올리면 가슴이 죄어온다. 그당시 과제가 주는 중압감에 교수님께서 왜 그주제를 간호학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조차 이해 못하면서 숙제를 했던 기억이 난다.
책 한권을 모두 마칠즈음 어렴풋이 이 주제가 간호학을 공부하는 우리에게 너무 필요한 것임을 인식하게 됐고, 낯설기만 했던 혁신(Innovation)이라는 용어에 조금은 다가설 수 있었다. 십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비로소 그분의 뜻을 어느 정도나마 헤아릴 수 있게 되었고, 나름대로 다듬고 정리해 매 강좌 때마다 학생들에게 반드시 소개해주는 강의의 주제가 되었다.
강의 내용이 주는 매력 이외에도 내가 그 시절 그 강좌를 잊지 못하는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추물이 발갛게 물든 교수님의 손이다. 강의가 끝나 점심을 먹으면서 우연히 교수님 손을 보게 되었고, 우리들은 손이 그렇게 된 사연에 대해 질문을 했었다. 그때 교수님의 말씀은 너무도 단호했다. “내가 밖에서는 교수이지만 집에서는 주부이기 때문에 모든 주부들이 그러하듯 직접 김장을 담그느라 손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덧붙여 하신 말씀은 아직도 우리들 귀에 생생하다.
공부하고있다는 핑계로 친정어머니를 동원해 김장을 담그면서도 한번도 죄송하다는 생각을 못했던 내 자신을 돌아보며 말이다. 그분은 “당신들은 앞으로 큰일을 할 사람들이니 무의식적으로라도 간호학에 기여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갖고 살아야해”라며 우리들을 채찍질해 주셨던 분이기도 하다. 학회 중책을 맡기시면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며 열심히 해보라고 하셨던 기억, 중책을 소화하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교수님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하고 하면된다는 신념을 온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다.
지금도 연로해지신 은사님 댁을 방문하면서 은퇴하신지 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간호사 서적을 보고 연구하시는 모습을 늘 접하게 된다. 그 모습만으로도 그 분은 나를 충분히 압도하고, 겸손과 도전의지를 일깨워 주신다. 이분의 가르침과 사랑속에 오늘의 내가 있음을 되새기며 그 크신 가르침과 사랑을 내 제자에게도 보여주며 함께 같은 길을 가리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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