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은 릴레이를 하듯 열심히 팬 서비스를 하고 있다. 봄의 문을 열어준 목련은 꽃망울을 터뜨리면서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더니, 며칠 전 내린 비와 바람으로 이내 섭섭함과 아쉬움을 남긴 채 초록색 옷을 갈아입을 준비를 하고 있다. 막간의 허전함을 달래 주려는 듯 노오란 개나리가 일색이다. 개나리는 요술쟁이다. ‘언제 겨울이라는 계절이 있었던가?’라는 착각을 하리만치 이전의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상큼한 마력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그 다음 주자는 벚꽃이다.
드문드문 하-얀 빛을 발하며 얼굴을 내민 곳도 있지만 캠퍼스에서 보는 벚꽃은 아직 연한 핑크색 꽃망울을 머금고서 수줍은 듯 몸을 움츠리고 있다. 다음 주쯤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너무도 다른 얼굴로 도도하고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많은 이의 가슴을 홀릴 것이다. 개나리가 상념을 잊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면 벚꽃은 사람을 홀려버리니 괴력을 갖고 있다고나 할까? 벚꽃의 화려함으로 봄은 절정에 달할 것이고 사람들은 넋을 잃은 채 한동안 몸살을 앓을 것이다.
우리가 벚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을 무렵 가랑비 내리듯 진달래가 살며시 다가와 살포시 미소를 짓고 있다. 아마도 꽤 오래 전에 내게 다가왔었는데 이제야 보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먼 곳만 바라보았다는 생각에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이내 정감어린 모습으로 다가와 든든함과 편안함으로 나를 감싸준다. 목련과 개나리, 벚꽃은 나름대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다가 우리에게 상처를 남기고 떠나지만 진달래가 있기에 우리의 시린 마음이 조금은 달래지는 것 같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말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실감이 난다. 이는 내가 4월의 화려함 속에 어느 정도 동화될 수 있는 가의 정도에 따라 느껴지는 잔인함의 비중이 달라지는 것 같다. 올 4월은 정말 잔인했다. 강원도 전역을 쓸고 간 산불이 그러했고, 그 속에서도 꽃을 피우며 우리들에게 많은 무언의 메시지를 전해주었으니 말이다. 우리 주변의 화려함이 우리를 상대적으로 더 처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해마다 봄이 오고 꽃들이 만발할 때면 몇 년 전 타계하신 친정아버지 생각에 눈앞이 흐려진다. 돌아가실 무렵에도 봄의 절정에서 정말 많은 꽃들이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모습들을 보여드리고 싶어 휠체어를 빌려 놓았는데, 끝내 보여드리지 못한 채 아버지와 봄을 송두리째 멀리 보내고 말았다. 그 해 봄부터 잔인하다는 느낌과 함께 가슴 한 구석이 시려오는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오랜 만에 ‘아버지’라는 말을 해보는 것 같다. 아버지가 곁에 계시지는 않지만 매년 봄이 올 때마다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확인하곤 한다. 동료 교수가 꽃이 피고 새순이 돋는 것을 볼 때마다 자신은 부활의 실체를 보는 것 같다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것이 부활이 아니겠는가? 부활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머지않아 대지가 초록빛 옷을 갈아입으면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본연의 일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래도 사계절이 있기에 우리들의 감정은 보상 받을 수 있는 것 같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