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순택 논설위원 |
고구려 벽화무덤 가운데 가장 크고, 벽화도 가장 풍부하며,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져 벽화무덤의 시원(始原)이 된 안악3호무덤. 그 옆 덕흥리무덤에선 무덤주인보다 은하수를 건너 망연히 견우를 바라보는 직녀만 쳐다보았다. 당대 세계 최고라는 현무도가 그려진 강서큰무덤,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감탄하며 쓴 글에 동의했다.
“아! 강서큰무덤이여! 고구려의 영광이여! 위대한 문화유산이여!” 눈의 호사를 놓기가 아쉬워 무덤 안에서 나갈 줄을 몰랐다. 과장을 조금 섞자면, 죄 많은 이 몸이 전생에 덕을 얼마나 쌓았기에 이런 가당찮은 호사를 누릴까 싶기도 했던 것이다.
고구려하면 떠오르는 한 사내도 만났다. 달리는 말 위에서 몸을 뒤로 젖히고 활을 팽팽히 당기는 사내. 중학교 시절 선생님은 ‘수렵도’의 사내를 가리키며 활을 보라고 하셨다.
‘여러 마디로 나뉜 것은 그 마디 뒤에 뼈를 갈아 덧댄 것이다. 그러면 탄력성이 좋아져 활길이가 짧아도 화살이 멀리 나간다. 이런 활이라야 말 위에서 쏠 수 있다. 이를 각궁(角弓)이라 하는데,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는 우리 활이다. 이 활만으로도 이 사내는 우리들의 조상이다.’
활이 DNA가 될 수 있을 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되, 이후 사내는 내게 있어 주몽이 되었고,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양만춘이 되었다. 고구려 그 자체가 되었던 것이다.
사내를 보면서 거듭거듭 확인케 되는 것은 역사란 죽어버린 과거가 아니라 현재 속에 살아있는 과거이고, 먼 미래에까지도 이어질 과거라는 것이다. 민족의 저력은 지금 우리만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로부터 단절됨이 없이 미래에도 영구히 계승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체제나 정권도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나 민족의 기상(氣象)은 영원히 이어지는 것이다. 잠시 희미해지는 듯하다가도, 길가의 풀처럼 파릇파릇 되살아나 끈질기게 이어간다. 나라는 망해도 민족은 멸망하지 않는다는 의지가 여기에 있다. 내가 그 증거다. 사내는 그렇게 들려주었다.
그러나 한편 솔직히 말해서 착잡한 생각 또한 지울 길이 없다. 우리가 어찌했기에,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게 비쳤기에, 국가적으로 얼마나 힘없이 보였길래 중국이 ‘음모’를 꾸민다는 말인가. 그동안 무얼 했기에 동북공정을 계기로 이제 와서 새삼스레 고구려를 공부하고 민족의 자존과 자주정신을 다짐하는 것인가.
고구려는 우리 민족사에서 반도사관을 완벽하게 극복한 나라이자 대륙과 해양을 동시에 지배했던 동아시아 문화의 중심지였다. 고구려 사람들에게는 선택받은 천손(天孫)민족이라는 자부심과 역동성, 탐험정신이 있었다. 이를 우리 사관(史觀)으로 삼아야 할 판국에 역사를 빼앗긴다는 게 말이 되는가.
수덕사의 선승 만공선사가 살아계셔서 동북공정 얘기를 들었다면 사자후(獅子吼)를 토해 냈을 것이다. 일제시대 미나미 총독이 사찰령을 제정해 한국 불교를 왜색화하려 하자, 주지회의 자리에서 선사는 벌떡 일어나 일갈했다.
‘청정이 본연하거늘 어찌하여 홀연히 산하대지가 나왔는가(淸淨本然 云何忽生 山河大地).’
선사의 말씀을 필부가 함부로 용훼할 일은 아니로되, 굳이 해석을 하자면 ‘구름 걷히면 이내 청산인데 시시비비가 웬말이냐’하는 질타이고, 속담을 빌자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드느냐’하는 호통이다.
중국과 일본이 아무리 지우고 덮어서 개칠범벅을 해놓아도 역사의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 고구려전에 가보라. 자랑스런 우리 역사, 역사의 진실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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