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초대석]사랑하는 나의 제자 미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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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초대석]사랑하는 나의 제자 미정이

  • 승인 2005-03-28 00:00
  • 중부대교수. 문학평론가 신웅순중부대교수. 문학평론가 신웅순
새까맣게 장대비가 퍼붓고 있었다. 천둥도 치고 번개도 번쩍거리고 있었다. 질퍽질퍽한 논둑길. 구두는 찰떡처럼 떨어지지 않고 흠뻑 젖은 신사복은 너무나 거추장스러웠다.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앳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산마루 오두막집에 살고 있는 우리 반 미정이었다. 비를 맞고 가는 나를 보며 산길을 사정없이 달려온 것이다. 찢어진 우산이었지만 그렇게도 고마울 수가 없었다. 공부를 잘 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항상 다소곳하고 순하기만 한 아이였다.

그 때 나는 사랑은 베풀어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다. 깊은 생각과 철학을 나에게 주고 졸업한 초등학교 선생 적 나의 제자, 미정이. 그 아이는 비를 맞으며 산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분명 찢어진 자기 우산 하나 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것을 내게 주고 간 것이다. 빗속으로 사라져가는 그 아이의 뒷모습은 서럽게도 아름다운 사진 한 컷이었다.

나를 애틋하게 생각했던 그 때 그 제자의 마음, 그런 마음을 나는 누군가에게 베풀어 주어 보았는가. 지금도 제자 같은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을 정말 갖고 싶다. 몇 십년동안 실천이 따르지 않는 나의 마음. 오늘은 주룩주룩 내리는 봄비 같은 회초리로 피맺히게 후려치고 싶다.

봄비가 내린다. 갑천의 물도 제법 많이 불었다. 오늘 따라 출근길에는 몇 마리의 백로만이 물질을 할 뿐 물오리, 해오라기들은 보이지 않는다. 졸업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나의 제자 미정이.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가 찢어진 파란 우산을 들고 동화처럼 산 아래로 달려오는 것 같았다.

그 아이가 보고 싶다. 어디엔가 살고 있을, 남편만을 기다리며 행복하게 살고 있을, 양보만 하고 살고 있을 그 아이가 보고 싶다. 빠듯한 남편 월급을 쪼개고 쪼개면서 이 집 저 집 전세로 살고 있는지 모른다. 부자 남편을 만나 화장 짙은 얼굴, 뚱뚱한 복부인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 무엇도 그 애에게는 충분한 행복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사는 것은 매 한가지이다. 돈이 많다고 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도 돈이 부족하다해서 결코 불행하게 사는 것도 아니다. 그 때 그 아이처럼 맑은 영혼을 죽을 때까지 갖고 사는 것, 그것이 바르게 사는 것은 아닐까. 지상에는 언제나 바람이 불기 마련이고 바다에는 언제나 파도가 치기 마련이다.

쓴맛, 단맛, 매운 맛, 짠 맛 다 보았을, 누군가를 진정 사랑할 수 있는 나이, 그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지금은 그 때 그만한 아이를 갖고 있을 나이 40이 넘었다. 내가 마지막 초등학교에 재직했던 그 학교는 폐교 되었고 그 애의 산집도 없어졌다. 몇 번을 찾았지만 그 때마다 공교롭게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마도 지지리도 못살았던 그 때 그 아이가 거기에 두고 간 고향의 비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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