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기독교회에서 부활의 메시지를 빼어버린다면 회색빛의 창백한 이론으로 전락할 것이다. 기독교는 그 초기부터 십자가의 고난과 빈 무덤으로 표현되는 부활의 메시지에 기초하였다. 역사이래 수많은 이론과 철학이 교회의 부활메시지를 훼손하려 하였으나 그 모든 시도는 불발탄으로 끝나고 말았다.
심지어 기독교의 부활을 정면 부정한 공산주의조차 그 표면적 생명이 70년 동안만 유지되었을 뿐이다. 많은 나라가 제도적으로 부활신앙을 차단하려 하였으나 그 모든 음습한 음모는 백일하에 드러나 수치를 당했을 뿐이다.
모든 이론의 마지막은 무덤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새로운 부활로부터 출발한다.
부활신앙(復活信仰)은 창조신앙(創造信仰), 구속신앙(救贖信仰), 그리고 재림신앙(再臨信仰)과 더불어 믿는 자들의 영혼을 윤택하게 하고 희망을 선물한다. 창조신앙을 통하여 한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을 절감한다.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찰스 타운스 박사는 “생명의 탄생은 초월적 설계자에 의하여 가능하다”는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을 주장하였다.
어차피 기독교인들이야 창조론을 신뢰하지만, 그 나머지 많은 사람들은 진화론의 가설을 삶의 중심 체계로 수용하든지 아니면 불가지론자로 남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와 연결되어 있을 때 자기가치를 발견하기 쉽다는 것이다.
하늘의 영광에 머물기보다 사람을 존중하시는 모습 속에서 사람은 비로소 삶의 안전지대를 발견할 수 있다. 자기의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타인의 행복과 삶의 가치에도 관심을 가지게 마련이다. 어찌 자기에게 임한 구원을 독점하려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만약 예수님께서 사망 곧 죽음에게 점령당한 채로 백기를 들었다면 그는 결코 전능하신 메시아는 아닐 것이다.
역사 이래로 죽음의 권능을 깨뜨리고 사망의 목을 밟은 존재는 그 전에도 후에도 없었다. 죽음은 인간의 마지막 행로가 아니다. 사람이 부활신앙을 소유할 때 죽음 저 너머에 있는 세계를 희망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로 굳게 설 수 있다.
사람은 그 믿음에 따라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무질서가 가슴에 자리잡고 있으면 혼란스런 삶을 살 것이고, 분명한 인생의 소명을 품고 살면 그 삶이 반듯하게 나타날 것이다.
만물이 기지개를 켜는 계절에 부활절이 들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이기도 하다.
생명의 약동은 부활의 소망을 가시적으로 보여 준다. 우리가 계절의 변화를 통한 교훈을 외면하지 않듯, 안목의 변화(Paradigm Shift)를 통한 삶의 변화를 꿈꿀 수 있다.
부활의 영광이 모든 이들에게 삶의 은총과 행복으로 임하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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