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인가, 일찍이 불가에서는 ‘인생은 고해’라 했거니와, 지구촌 각처에서, 인근 국가에서, 우리나라 방방곡곡 국민의 대부분이 고통을 호소하고 불행을 외치고 있는데, 무슨 놈의 얼빠진 행복 타령이냐고 나무랄 것이 뻔하다. 그렇다. 이 어지러운 세상, 권력과 물질 등 세속적 욕망을 기준으로 한다면 이 세계는 전쟁의 소용돌이요, 아수라에 아귀다툼의 현장이기에 못가진 자와 덜 가진 자, 심지어 많이 가진 자까지도 함께 뒤엉켜 고통을 호소하고 불행을 외치며 파멸까지도 겁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생각을 바꾸어 정신과 문화 등 인문적 이상을 전범으로 한다면 이 세상은 평화의 빛으로 충만하고 상생·번영의 이상향이기에 가난한 자와 부족한 자, 나아가 넘치는 자까지도 함께 어울려 행복을 구가하고 행복을 나누며 영생 극락을 꿈꿀 수가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물질·문명적 불행을 정신·문화적 대방편으로 구제해 우리 모두의 행복으로 승화시키자는 선각자들의 경고와 전망은 지당한 진리요, 필연적 실천이라 하겠다. 일찍부터 종교는 잘 사는 방법학이라 했다.
그러기에 이 종교는 위 정신·문화의 중심에 서서 불행한 인류를 행복으로 이끄는 지도적 이념이요, 구체적 실천 덕목임에 틀림이 없다. 그 중에서도 불교는 종교 중의 종교로서 차라리 빼어난 행복학이요, 행복의 길이며, 나아가 행복 그 자체다.
부처님은 행복의 진리를 깨닫고 가장 행복했으며, 오로지 행복의 원리와 실천을 수범해 중생을 행복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평생 금구옥설과 법문, 일체의 수범을 통해 중생의 행복을 설파하고 직접 행복으로 이끌어 밀어주시되, 그 방편이 너무도 실제적이고 가장 효율적이었다. 먼저 무명 중생들에게 현실적인 고통과 불행을 실감·체득케 하고 그 바탕을 딛고 현실을 극복해 복락과 행복으로 오르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생은 고해이니, 벗어나 행복으로 가라’, ‘인생의 현실은 진흙탕이니 여기에 뿌리하여 연꽃으로 피어나라’, 모두가 이러한 방식이었다.
나아가 부처님은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라는 행복의 씨앗이 있음을 직지하고, 각자가 이를 발견해 싹틔워 꽃피우고, 마침내 행복의 열매로써 성불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행복의 주체 주인공이 되어 그 행복을 자유자재로 누리라고 가르친다. 그러기에 어떤 절대자에게 중생들의 모든 것, 행복까지도 결코 바치지 말고, 각자는 행복의 권리보다 행복의 의무를 다하라며 삼장을 설하시고, 지극히 행복한 열반에 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가 행복의 종교라는 점은 확고 불변한 것이다.
기설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모든 종교는 원래 행복을 추구하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종교는 행복이다’라는 명제는 영원한 진리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어떤 종교에서는 우리 중생 일체를 절대자의 피조물이나 노예로 규정하고, 중생의 모든 것을 모조리 절대자에게 바칠 때 비로소 행복을 내려 주신다고 믿고 실천한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의 주체적 행복을 무시함으로써 우리 고유한 행복의 권리와 의무를 말살한다면 앞으로 엄중한 책임을 져야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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