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노인의 대답인즉 “조금 있다가 해가 뜨겁게 비치게 되면 모래 위에 남아있는 불가사리들이 죽기 때문에 그것들을 바다에 던져 넣어 주는 것”이라고 했다. 청년에게는 노인의 일이 어리석게만 보였다. 그래서 청년은 자기가 느낀 그대로 노인에게 말을 했다.
“할아버지 이 몇 마일이나 되는 모래사장에는 수만 마리 아니 수십만의 불가사리들이 널려져 있는데 할아버지가 그 중에 몇 마리를 주워서 바다에 던져 넣는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효과가 있고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손에 있는 불가사리를 바라보다가 바다에 던져 넣으며 이렇게 말을 했다. “그러나 이 한 마리에게는 생사의 큰 차이가 되지요.”
그렇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한다 해도 내가 하는 일들이 아무런 성과도, 아무런 차이도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것도 하나에서 시작된다. 100도 1에서, 1000도 하나에서, 만도 하나에서, 억도 하나에서 시작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를 너무 하찮게 여길 때가 많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오늘 사회를 병들게 하고 또 사회질서를 다 깨뜨려 놓는다. 그리고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에서 우리는 잘못된 일에 너무 쉽게 동화되어 버린다.
또한 반대일 수도 있다. 모든 일은 하나에서부터 시작된다. ‘0’을 쓰고 거기에 많은 ‘0’을 가져다 놓아도 ‘0’이 될 수밖에 없다. ‘1’을 쓰고 거기에 ‘0’을 가져다 놓으면 가져다 놓는 만큼 ‘1’은 수가 많아진다. 여기서도 우리는 다시 하나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때로는 사람들이 흔히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나 혼자 어떻게 그 큰 일을 하느냐?’라는 생각에서 일을 시작도 해보지 않고 너무 쉽게 좌절해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를 소중하게 보신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1대1의 관계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군중 속의 나를 보시고 나를 찾으신다.
내가 아무리 정직하게 살고 진실하게 살아도 이 사회가 바로 정직한 사회, 진실한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날마다 옳은 일을 한 가지 한다고 해서 사회가 정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무엇인가 내가 하는 일을 통하여 이 사회가 만분의 1, 아니 10만분의 1이라도 변화될 수 있다면 그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무슨 일을 하기가 어려울 때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표현을 쓴다. 계란으로 바위를 쳐보아야 계란만 깨지고 만다. 그러나 설령 계란만 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옳은 일이고 정당한 일이라면 계란으로 바위를 칠 수 있는 용기는 있어야 한다.
한 방울의 물이 바위에 떨어지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계속 떨어지는 한 방울 한 방울의 물은 바위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 간다.
하나의 힘은 작지만 그 힘이 계속 모아지면 그 하나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그 하나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나 하나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한다. 나 하나가 하나님 앞에 바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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