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의 읍 소재지를 벗어나 송백을 지나면 남명리 종점에 학교가 있었다. 읍에서 목욕을 하고 학교 사택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의 1시간 30분은 몸에 다시 흙먼지가 하얗게 붙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2~3년 전에 가르쳤던 아이들을 길에서 만날 때가 종종 있다. 그나마 멋쩍게 와서 인사하면 “그래 너 누구 아니니?” 하고 기본 예의라도 지키고 싶은데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아 난감할 때가 있다. 그런데 2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그곳에서 가르친 아이들의 이름과 출석 번호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중에서도 성목이는 잊을 수 없는 아이이다.
책과 함께 외롭지 않은 넉넉한 시간들을 보낼 때 성목이는 작은 방에 늘 혼자 있는 내가 안돼 보였는지 어김없이 날 찾곤 했다. 늦은 저녁까지 부모님의 농사 일을 돕느라 날 찾지 못하는 날이면 홀로 있을 날 걱정하는 일기 글이 올라오곤 했었다.
“선생님은 심심하지 않으니 걱정 말거라.” 이 한마디를 못 해줘서 맘 졸이게 했던 일이 제일 안타깝다. 자식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은 이런 이기심은 포함하지 않으리라.
다 부서져서 바퀴가 제대로 구르지 않는 짐 자전거에 배추 한포기를 까맣고 두꺼운 긴 고무줄로 칭칭 감아 싣고 와선 웃음으로 건네주고 가던 성목이의 뒷모습이 아련하다.
깨끗한 그곳에서 잊을 수 없는 아이들과의 3년의 생활, 늘 새 울음소리로 시작한 그 곳을 떠나야 할 때가 왔었다. 성목이는 교문 쪽으로 나가는 내 걸음만 계속 막았다. 아무 소리도 안하고 옷자락 하나 잡지 못한 채… ….
나도 아무 소리도 할 수가 없었다. “잘 있어” 이 짧은 인사말조차 못 했다. 눈물을 참지 못 할 것 같아서였다. 꼭 안아 주지 못한 아쉬움이 20년이 지난 지금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지금 쯤 성목이에게는 버스가 떠난 뒤의 흙먼지를 막기에 너무나 작은 전봇대 뒤의 희미한 성목이 모습만한 아들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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