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재동 백제불교문화대학대학원장 충남대 명예교수 |
여기서 각개 종교는 자체의 번영과 교세의 확장, 발전을 위하여 최선의 방편을 갖추게 된다. 그래서 최소한 신앙의 대상과 신앙인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 신앙의 형태가 각기 특성화의 방향을 찾게 되었다. 그러한 종교적 방향은 크게 두가지 경향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우선 절대자, 신앙의 대상이 주체가 되어 신앙인은 그의 피조물이거나 노예에서, 그들의 모든 것이 그 주체에 의하여 좌우되고 조종됨으로써, 오히려 신앙인의 모든 것을 통째로 그 쪽에바쳐버리는 결과가 된다. 그래서 이른바 타력신앙의 전범을 이루고, 그 지극한 기구를 통하여 그 절대자의 은총속에서 행복을 누린다는 명분과 당위성을 확보하고 있다. 대강 기독교를 중심으로 타력신앙을 지향하는 모든 종교가 이런 경향을 띠고 전개되어 온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 그 잘 사는 주체, 행복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인가. 그 신앙의 대상인 절대자인가, 그 신앙인 자신 인간인가. 그 해답은 신앙인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그때의 인간은 어떤 상황속에서든지 신앙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행복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잘 사는, 그래서 행복한 방법학으로서, 종교의 목적과 이상은 허물어지겠기 때문이다.
한편 신앙의 당사자 인간이 주체가 되어 신앙의 대상, 절대자는 인간의 마음에 현현하는 위신력의 절대자로서, 인간에게 권능을 발휘하여 발원에 따르는 행복을 창출토록 돕는다는 성취를 보인다. 그래서 소위 자력신앙의 전범을 보이고, 그 거룩한 비원을 통하여, 그 무량광, 무량수 내지 대자대비의 권능과 교감하고 하나가 됨으로써 그 가운데서 행복을 구가한다는 원리와 실권을 보장받고 있다. 대체로 불교를 중심으로 자력신앙을 추구하는 종교가 모두 그런 경향을 가지고 발전되어 온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더욱 명백해지는 것은 인간이, 바로 우리가, 곧 내가 신앙의 주체임은 물론 행복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래서 이러한 경향의 종교는 모두 인간이 잘 사는, 그래서 행복한 방법학이라는 점에서, 가장 빼어난 이론과 방편을 갖추었다고 하겠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종교가 인간이 잘 사는, 그래서 행복을 누리는 방법학이라는 대명제를 상기, 확인하면서 뼈를 깎는 자성을 할 때가 되었다는 점이다. 기실 기독교 중심의 타력신앙이든, 불교중심의 자력신앙이든, 역사적 교훈을 잊고 바야흐로 타력신앙으로 기울어 열광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인간의 마음과 지혜가 창정하고 체계화하여 신앙하면서 행복의 방법학으로 정립시킨 종교가 비대, 확장되어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고 상전으로 군림한다면, 그래서 거기에 말려 들어 방황한다면, 우리는 인간성과 주체성을 상실하고 노예로서 비운을 맞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인간의 종교, 우리의 종교, 나의 종교가 아닌가. 올바로 믿고 실천하여 신앙의 주체, 행복의 주인공이 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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